지난번 연맹모임 때 모였던 12개 면의 모든 연맹원이 다 죽을 거니까 혹시 지금 모인 3개 면의 여러분만 억울하다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내일 저녁까지는 다 이곳에서 죽을 것이니 이 점 오해 없길 바랍니다. 그럼 훈화 끝!
박건웅 작가의 만화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진지함과 함께 굉장히 불편한 감정을 동반한다는 사실이다. 김근태 고문 사건을 다룬 <짐승의 시간>이나 민간인 학살을 그린 <노근리 이야기> 같이 역사 속에 묻힌 어두운 사건을 만화 속에 기록하여 사건이 발생하는 현장에 독자를 소환한다. 독자의 눈앞에 펼쳐진 역사의 현장은 긴박하면서도 처절하다. 솔직히 어떤 장면은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생생하다. 독자는 페이지를 넘기면서 등장인물과 함께 작품 속 살아 숨 쉬는 제3의 등장인물이 된다.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은 제목 그대로 한 어린 물푸레나무의 시점으로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한 장면을 포착한 작품이다. 한적한 산속에 사는 물푸레나무에게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민주주의 이념이나 사회주의 이념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렇기에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며 순수하게 눈앞에 보이는 대로 있었던 일을 증언한다. 늘 혼자 있어 심심했던 물푸레나무는 그래서인지 죽음을 앞둔 많은 사람이 깊은 산속에 찾아오는 것을 어린이 같은 마음으로 좋아하기까지 한다. 이 작품은 스토리를 진행하기보다 민간인을 학살하는 현장을 포착하여 묘사하는 데 집중하였다. 무수한 민간인이 학살당하는 것에 감정적 동요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안타까움이 극대화된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1950년 한국전쟁 중에 대한민국 국군, 헌병, 반공 극우단체가 다수의 민간인을 살해 한 사건이다. 피해인원은 10만 명에서 최대 20만 명으로 추정된다. 만화는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독자가 시대적 배경을 추측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만화 초반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 “연맹에 가입하믄 비료도 주고 쌀도 주고” “삼팔선 너머 우리 국군이 공산당들을 몰아내고 있다던디”의 두 문장 정도이다. 다시 말해 시대적 배경을 언급하지 않았다면 어느 시대에든 발생할 수 있는, 공권력이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하는 장면이 되는 연출이기도 하다.
또한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컷선(또는 테두리선으로도 불린다)을 활용했다는 데 있다. 만화에는 컷과 컷 사이에는 일정한 여백을 두고 두 개의 컷선이 그려진다. 컷선은 장면을 분할하여 스토리의 시간적, 공간적 진행, 분위기의 전환을 표현하는 역할을 한다. 일반적인 만화의 컷선은 깨끗하고 일정하다. 그러나 이 작품의 컷선은 다른 만화와 같지 않다. 컷선이 꽤 두꺼우면서도 투박한 편으로 일정하지 않다. 그래서 판화의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단순히 시간이나 공간적 진행을 표현하는 것 이상으로 이질적인 느낌이 든다. 주제가 민간인 학살이니만큼 작품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가 기저에 깔려있으며 컷선 연출이 이에 한몫한다. 작품 전체적으로 검은 바탕도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밤을 나타내는 동시에 시대가 지닌 암울한 분위기를 직관적으로 표현한다. 사람들이 입은 옷과 표정도 마찬가지다. 경찰은 검은색 제복을, 민간인은 흰색 옷을 입혀 두 집단을 의도적으로 구분한다. 민간인은 비교적 표정이 뚜렷이 그린데 비해, 민간인을 학살하는 경찰 대부분의 표정은 없거나 뚜렷하지 않다. 감정 없이 기계적으로 민간인을 학살하는 행위, 위에서 시켜서 수행하기에 정당성을 담보한다는 이들의 감정을 작가는 간접적으로 지적한다.
학창 시절 나름 역사공부를 많이 했다고 생각했지만, 이 만화를 읽고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일반 사람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지만 희생자 유가족에게 이 사건은 천추의 한이 되는, 평생을 괴로워할 만한 사건이다. 역사의 어두운 장면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아프지만 생생하게 드러낸 것은 이 작 품의 유의미한 지점이라 생각된다.
#국민보도연맹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평화의소중함 #6.25
문화다양성 추천만화 vol4. 국가폭력 / 홈통만화연구실(2025.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