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여명 Jan 19. 2021

나답게 살아간다는 고단함

스토너_존 윌리엄스

등장인물, 줄거리, 분위기 그 어느 하나 취향이 아닌데도 이상하게 마음에 오래 걸려있어, 주기적으로 손이 가는 책이 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책을 덮고 나서도 이상한 여운이 오래가서 한참 생각나는 그런 책이 있다. 잊고 살다가도 불현듯 떠올라서 썩 내키지는 않는데도 다시 손에 들게 되는 책이 있다. 나에게는 스토너가 그런 책이다. 애착이 가는 등장인물도 없고, 분위기는 시종일관 담담하거나 답답해서 처음 그 책을 손에 들었을 때 이건 두 번은 안 읽겠구나 생각하며 읽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매년 적어도 한 번은 스토너를 찾게 된다. 올해도 나는 만 나이가 바뀌는 날 스토너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도대체 소설의 어느 부분이 마음에 콕 박혀서 이렇게 오래, 그리고 주기적으로 손이 가는 걸까.


읽을 때마다 이 장면은 새롭다. 이런 극적인 순간 없이 전공을 정하고, 직장을 정하고, 이직을 해온 나에게는 정말 부러운 장면이었다. 스토너에는 이런 묘사들이 종종 눈에 띈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듣고 나서 충격에 가까운 감동을 받은 스토너가 강의실의 사소한 부분들을 온 감각으로 인지하는 장면이 특히 그렇다.

내가 읽어온 문학 작품들 속에서는 주인공의 삶을 편집본으로 보여줬었다. 매일매일의 평범한 생활을 간단한 서술이나 생략으로 처리하고, 특별한 사건에 더 집중해서 영화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스토너는 세밀함의 정도가 다를 뿐 다큐멘터리처럼 삶의 모든 과정을 진득하게 그려낸다. 참전을 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섰을 때도, 지난한 고뇌의 과정을 모두 보여준다. 스토너의 인생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읽는 나도 함께 고민하는 느낌이 들었다.

완성하고 나서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어 보면 생각했던 것보다 뛰어나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말이 특히 와닿았다. 책을 낸 건 아니지만, 여명이의 이야기로 브런치북을 엮고 나서 나는 스토너가 그랬던 것처럼 자주, 진력이 날 정도로 읽었다. 언젠가 내 이름으로 책이 나온다면 나도 스토너와 비슷한 감정을 가지게 되겠지.

스토너는 초고속으로 진행했던 자신의 결혼이 실패했다는 걸 너무 일찍 알아차린다. 그러나 스토너는 그 결혼을 어떻게 해결하려 하지 않고, 묵묵히 견딘다. 나는 여러 번 답답해서 가슴을 치게 만들었던 사건들을 겪으면서도 묵묵히 견디며 자신만의 삶을 살아나간다. 그런 스토너가 내린 사랑의 정의라서 나에게는 아주 묵직하게 느껴졌다.

전쟁이 끝난, 혹은 멈춘 후의 삶에 대해 최근 1년 동안 생각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전쟁을 직접 겪지 않았더라도, 단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도 전쟁이 남긴 깊은 흔적을 보며 그 파괴력과 참혹함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다.

정작 스토너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지만, 그의 삶을 들여다보며 나는 살면서 만나지 않으면 더 좋을 인연도 제법 많겠다고 생각했다.

책을 읽는 중에는 다른 인물과 다른 문장들에 집중하다가도, 마지막의 '너는 뭘 기대했나' 부분을 읽으면서 결국 이 문장이 마음에 남아서 나는 매년 스토너를 다시 찾는구나 생각했다. 스토너의 인생은 큰 성공과는 거리가 있는 평범과 불운 사이를 오가는 삶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작가의 말처럼 스토너는 자신의 일을 끝까지 해냈고, 그 일을 사랑하기까지 했으므로 행복한 인생이었을 거다. 외부의 평가가 어떻든 그는 자신의 삶을 자신답게 끝까지 묵묵히 살아냈다. 그게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 매년 더 절절하게 느낀다.


초판본 디자인으로 새롭게 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올해는 초판본의 커버를 입은 스토너를 읽었다. 달라진 건 책 표지뿐이고 내용은 그대로일텐데, 올해 읽으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내가 이 책의 줄거리가 마음에 안 들고 어쩌고 하는 것도 결국 이렇다 할 큰 사건이나 시원한 사이다 없이 담담하게 펼쳐지는 전개가 현실적인 내 삶과 비슷하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매년 이 책을 찾는 이유도, 묵묵히 나답게 살아갈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인 것 같다. 누군가에게 스토너를 소개할 때는 또 인생 책은 아니고 그렇게 마음에 들지도 않고 구구절절 설명하겠지만, 결국 나는 가까운 미래에 또 스토너를 찾게 될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몇 번째 단골손님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