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례지만, 이 책이 시급합니다_이수은
분명히 재미있는데 얼른 후다닥 다 읽는 건 내키지 않아서 조금씩 아껴읽게 되는 책이 가끔 있다. 뒷내용이 너무 궁금해서 일단 끝까지 읽어내야 하는 문학작품보다는 내용이 한 번씩 끊어지는 에세이들 중에 많은데, 이 책도 그랬다. 편집자로 오래 일했고, 번역가로도 활동했던 작가의 책 이야기가 살짝 궁금해서 진작 쟁여 놓고는, 올해 초부터 찔끔찔끔 읽다가 설 연휴 동안 다 읽었다.
아무래도 책과 가까운 직업이다 보니 편집자들은 보통 책을 많이 산다. 나도 편집자로 일할 때 책을 제일 많이 샀었다. 책을 많이 사는 것과 많이 읽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그런데 이 책을 쓴 이수은 작가는 편집자들 사이에서도 책 많이 읽는 편집자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런 작가가 추린 책 52권이 궁금했고, 그 책들을 언제 읽기를 추천하는지도 궁금했다.
'사표 쓰기 전에 읽는 책'은 연휴 끝무렵에 가장 필요한 꼭지가 아니었나 싶다. 나는 1인 1묘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라서 사직서를 찢고 출근을 해야 하는 후자다. ‘취미는 이직’인 사람으로 살면서 사직서에 서명을 해본 적도, 사직서를 찢어본 적도 있는데 저 말이 맞다. 어느 쪽이든 결국 후회는 없다. 이 챕터에서 추천했던 '달과 6펜스', '변신'에 대한 이야기도 공감을 많이 하면서 읽었다. 특히 변신은 다시 읽을 때 느낌이 새로울 것 같다.
챕터 제목은 '아무것도 하기 싫으면 어떡하지'지만 사실 새로운 일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사람이 읽으면 좋을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실패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야 새로운 뭔가에 도전할 수 있을 테니까, 작가의 말처럼 한 걸음 내디딜 용기가 필요한 사람이 읽으면 좋겠다. 실패가 잔뜩 담긴 소설이지만, 작가는 결국 오웰이 굳건하게 희망의 근거를 제시한다고 했다. 실패 한 가지만으로도 기가 푹 꺾이는 나로서는 거의 모든 종류의 실패에 대해 담아놓고 어떻게 희망의 근거를 제시하는지 궁금해서 이 책을 꼭 읽어보고 싶다.
지금 다니는 직장에서 가장 많이 하고 있는 '시간'에 대한 생각을 이 챕터를 읽으며 조금 정리할 수 있었다. 칼퇴 정시 퇴근을 눈치 안 보고 할 수 있다는 장점(정시 퇴근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도 장점으로 분류하는 게 서글프지만)이 있지만, 박봉이라는 단점이 너무 치명적인 지금 회사. 내 시간을 너무 헐값에 팔고 있는 건 아닌지 항상 고민스러웠다. 고민하느라 쓰는 시간을 좀 더 생산적으로 써야겠는데, 그러려면 사사건건 일희일비하지 않는 단단한 마음을 가져야겠다 싶었다.
작가랑 공통점이 제법 많아서 중간중간 공감을 많이 하며 읽었는데, 가장 공감했던 부분은 여행에 대한 이야기였다. 막상 가면 하루에 3, 4만보씩 걸으면서 제일 신나게 여행을 하지만, 나도 여행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아서 가려고 마음을 먹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 여행 갈 때 책을 챙겨가는 일은 거의 없고, 현지에서 책을 조달하거나 뭔가를 쓰거나 하는 일이 더 많다. 책 더러워지는 거 못 참겠잖아요... 내가 밑줄 하나 안 긋고 그렇게 아껴 읽는 책을 김여명이가 매번 스크래처로 쓰고 있다.
여행길에 추천할 도서가 없다는 얘기를 한참 풀어놓던 작가는 갑자기 책 두 권을 탁 꺼냈다. 추천한 책의 제목만 보고 장난하나 싶었지만, 작가가 이 책들을 추천하는 이유를 읽다 보니까 수긍하게 되더라. 문과대학 인문학부 출신이지만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수학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작가가 영화 소개하는 김경식처럼 너무 재미있게 얘기해서 그런 걸 수도 있겠다.
작년에는 유독 전쟁 문학을 많이 읽었다. 전쟁을 겪은, 심지어 그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나라에 살면서도 지금 당장이 평화로워서 그걸 곧잘 잊고 산다. 그러다가 뭔가 사건이 터지면 그제야 우리나라는 아직 전쟁이 끝난 게 아니라 멈춘 상태라는 걸 새삼 절감한다. 이념이 다르다는 게 목숨까지 위협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읽으며 지금 누리고 있는 이 평화가 얼마나 어렵게 얻어지는 것인지, 또 얼마나 쉽게 잃을 수 있는 것인지를 생각했다.
저 문장 바로 뒤에는 그런 클리셰에서 가장 먼 정세랑 작가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재기발랄하고 참신한 소설을 쓰는 정세랑 작가를 나도 좋아해서 괜히 반가웠다. 아무리 밝고 유쾌한 소설이라고 해도 세태를 반영하기 마련이고, 그래서 생각할 점이 있다. 피하고 싶은 질문을 던져서 꼭 필요한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에 나는 소설가를 비롯한 문학인들이 꼭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그랬던 것처럼 프로 집순이면서 내성적인 나도, 책을 읽으면서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는 너른 광장에 서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내가 평생 겪어볼 일 없는 일도 책에서는 읽을 수 있고, 나랑 생각이 정반대인 사람의 의견도 좀 차분히 읽어볼 수 있다. 다 읽고 나서 별 정성스러운 개소리를 읽었다며 시간 낭비로 치부하더라도, 그걸 몰랐을 때보다는 그만큼 내 세계가 넓어진다. 그래서 재미있는 게 너무 많은 세상을 살면서도 책을 틈틈이 읽게 되나 보다.
'페이지 바깥으로 확산하는 색인들로 가득하다'는 정세랑 작가의 말처럼 이 책을 읽으면서 올해 읽을 책 리스트가 점점 늘어났다. 52권이면 1년 내내 일주일에 한 권씩 읽어야 할 양이니까 다 읽을 수는 없겠지만, '제5도살장'과 '카탈로니아 찬가'는 꼭 읽어보고 싶다. 고전부터 현대 소설까지, 인문학부터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한 시공간을 넘나드는 책 이야기를 읽었다. 책 덕후의 책 리스트를 들여다 보고, 그 책들을 언제 권하는지까지 읽었더니, 작가와 독서모임을 한 느낌이었다. 나는 종종 작가든 편집자든 번역가든 다른 어떤 사람이든 책 덕후들의 독서 에세이를 읽고 싶은 책 목록에 끼워 넣는다. 읽을 책이 더 풍성해지는 느낌도 들고, 같은 책을 읽고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것도 재미있어서. 일단 이 책에서 다뤘던 책을 장바구니에 몇 권 담았다. 언제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읽고 나서 이 책을 다시 한번 읽어도 재미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