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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명 Mar 02. 2021

곧 봄이 올 거야

봄 고양이 만춘이에게 보내는 편지

만춘아,

날이 좀 풀리는 것 같더니 비 때문인지 다시 추워졌네. 길에서 지내는 너는 추위라면 아주 질색팔색일 텐데 또 이렇게 추워져서 어떡하니. 나는 일기예보를 보고 마음의 준비라도 하는데, 너는 겨우내 당황스러웠겠다. 올 겨울은 특히나 다 얼어붙을 것처럼 춥다가 봄처럼 따뜻하다가 오락가락해서 더 힘들었을 것 같아. 이제는 피부 같은 롱 패딩을 입은 나한테도 올 겨울은 추웠는데, 너는 어땠는지 모르겠다.

여명이는 정말 잘 지내. 너랑 같이 온 동네를 누비면서 살 때보다 재미는 좀 덜할지 몰라도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면서 지내고 있어. 바깥이 꽁꽁 다 얼어붙은 날도 여명이는 절절 끓는 방바닥에 누워서 뒹굴뒹굴 지냈어. 솔직히 그때는 나도 여명이 엄청 부럽더라. 나는 자기 사료값 벌러 영하 15도에도 출근하는데, 바닥에 척 누워서 배웅도 안 해주더라고. 진짜 여명이 교육 어떻게 시킨 거니 만춘아. 장난감도 엄청 험하게 써서 나 똑같은 장난감 벌써 다섯 번째 사 온 것도 있어. 집에서 내가 잠깐만 다른 일 하려고 하면 호랑이 같이 크게 울어. 나 여명이 데려오고 나서 한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저런 앤 줄은 정말 몰랐어. 데려온 내 탓이긴 한데, 내 앞에 물어다 놓은 만춘이 네 탓도 좀 있는 것 같아.

쓰다 보니까 여명이 흉만 잔뜩 본 것 같은데, 그래도 여명이 기특해. 처음에 내 방에 왔을 때 많이 낯설고 엄마 보고 싶고 그랬을 텐데 한 번 보채지도 않고 적응 잘했었어. 나 나갈 때 배웅은 안 해줘도 나 돌아오면 마중은 기가 막히게 잘해. 너 닮아서 애교도 많은데, 너 닮아서 경계도 심하다? 집에 내 손님이 오면 숨숨집에 숨어서 꼼짝도 안 해. 그리고 너 닮아서 얼굴도 목소리도 엄청 귀여워. 처음에는 눈이랑 피부랑 다 아파서 못 봐주겠더니 요즘은 어디 아픈 데 없이 항상 쌩쌩한 컨디션으로 우당탕탕 잘 지내. 너무 적응을 잘해서 이제 내가 여명이 방에 얹혀사는 것 같아. 정말 멋진 아들을 낳았다 만춘아.

볕 쬐고, 지지는 거 제일 좋아하는 여명이

내가 갑자기 너한테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된 건 여명이 때문은 아니고 오늘 저녁에 일어난 일 때문이야. 오늘 집에 돌아오는데 우리가 자주 만나던 편의점 근처에서 할머니 두 분이 얘기 중이시더라구. 편의점 앞에서 밥 달라고 자주 울던 고양이가 저 아래 죽어있는 걸 할머니 아는 사람이 봤다고. 안 듣고 지나갔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항상 타이밍이 왜 이모양인지 모르겠다. 아이고, 어쩌다... 같은 이야기도 뒤이어서 하셨는데, 나는 그냥 안 듣고 집에 왔어. 더 못 듣고 있겠더라.

너를 마지막으로 만난 게 작년 추석 전이니까 우리 못 만난 지 정말 오래되긴 했다. 이렇게 오래 안 나타난 적은 없어서 해 바뀔 때쯤 되니까 슬슬 불안하더라고. 그동안 두 달 정도 안 나타난 적은 있었어도 이렇게 한참 안 보인 적은 없었잖아. 항상 너 나타나면 그게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고 마음의 준비는 하는데, 그래도 막상 한참 안 나타나면 마음이 그렇게 허전하더라. 항상 또 만나자고 인사하면서 너랑 헤어지는데 그게 언제일까. 항상 나는 그게 내일이기를 바라면서 인사했었는데, 너는 어땠을까. 편의점 주인아저씨는 요즘도 너 밥 먹던 자리에서 밥그릇 물그릇 챙기시던데 그분도 같은 마음이실 것 같아.

슬픈 소식을 들었는데도 실감이 안 나서 그랬는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서 그랬는지 눈물도 안나더라. 나도 어지간히 메말랐구나 하면서 집에 돌아왔는데 밥 먹는 여명이 얼굴 보니까 그제야 눈물이 터졌어. 밥그릇에 코를 박고 무아지경으로 먹는 여명이를 보다가, 길에서 밥 먹을 때 차든 자전거든 뭐라도 지나가면 후다닥 도망갔다가 다시 슬금슬금 와서 밥 먹었던 네 생각이 나서. 지금 생각해도 동네에서 나름 행복하고 자유롭게 사는 너를 데려다 키울 수는 없었겠지만, 마음 편히 먹을 수 있게 따뜻한 데서 밥 한 끼 챙겨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려. 네 마지막이 너무 고통스럽거나 외롭거나 춥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야.

여명이는 지금처럼 건강하고 씩씩하게 살 수 있게 내가 잘 챙길게. 여명이 진짜 대단한 고양이야. 보통 같이 사는 사람이 울면 동물들도 알고 와서 위로하거나 같이 불안해하거나 한다던데, 내가 울거나 말거나 밥 잘 먹고 있더라. 내가 이렇게 눈치 안 보는 고양이로 잘 키우고 있으니까 염려 마. 한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주는 건 사람에게도 쉽지 않은데, 만춘이 너는 내 삶의 한 부분을 완전히 바꿔놨어. 너를 못 만났으면 나는 고양이한테 관심이 없었을 거고, 지금처럼 여명이랑 같이 사는 일도 없었을 거야.

아직도 나는 할머니가 잘못 아셨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이렇게 구구절절 편지 쓴 게 민망하도록 어느 날 편의점 앞에서 네가 밥 달라고 울고 있으면 좋겠다. 아직 일러야 할 여명이 얘기가 한 보따리 있으니까 꼭 나타나 주면 좋겠어. 곧 너를 처음 만나고, 여명이가 태어난 따뜻한 봄이 와. 우리한테 제일 의미 있는, 예쁜 계절을 같이 못 보는 게 많이 아쉬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지내고 있어. 나랑 여명이도 지금처럼 즐겁게 복닥복닥 잘 지내볼게. 많이 보고 싶다 만춘아. 그동안 수고 많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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