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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명 Mar 29. 2021

잘 왔어, 우리 봄 고양이

만춘이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

만춘아,

우리가 처음 만났던 봄이 돌아왔어. 꽃이 쏟아질 것처럼 많이 피더니만, 무슨 조화인지 봄비가 오면서 주말에는 살짝 추웠네. 이걸 사람들은 꽃샘추위라고 부르는데, 실체에 비해 이름을 너무 예쁘게 붙인 것 같아. 나도 너한테 좀 더 예쁜 이름을 붙어줬으면 좋았을 걸. 나는 너랑 여명이한테 이름을 붙여주면서 내가 이렇게 호전적인 사람이라는 걸 처음 알았어. 너처럼 예쁜 고양이한테 (뜻은 그렇지 않지만) 장군 이름을 붙여서 지금 생각하니까 좀 미안해. 봄이 같은 예쁜 이름도 있는데 왜 그랬을까. 너한테 밥을 챙겨줬을 또 다른 누군가는 부디 예쁜 이름을 붙여줬었기를 바랄 수밖에. 길에 사는 친구들은 이름이 많을수록 그만큼 챙기는 사람이 많은 거라던데, 너한테 이름이 최소한 세 개는 있었던 거면 좋겠다. 그래도 만춘이가 제일 마음에 들지?

지난 토요일에는 비가 제법 많이 왔어. 습관이 정말 무서운 게 네가 안 나타난지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나는 네가 있던 자리를 한 번씩 살피고 집에 가게 되더라. 그날도 빈자리를 보게 될 걸 뻔히 알면서도 흘끗 봤는데 비어있지 않아서 흠칫했어. 하지만 전에도 비닐봉지랑 구겨진 박스가 네 자리에 있는 걸 보고 속은 적에 있어서 이번에도 그렇겠거니 했거든. 그런데 이번에는 진짜 고양이더라고. 너랑 정말 비슷하게 생긴 삼색냥이가 있어서 눈을 의심했어. 워낙 삼색냥이가 많으니까 그냥 비슷한 고양인가 했는데, 사람 기척 눈치채고 야옹하는 소리 들으니까 너인 걸 알겠더라.

하필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 나타나서 내 양손은 짐이랑 우산으로 한가득인 데다가, 급한 대로 가방에 항상 챙겨 다니는 간식을 꺼냈는데 그것도 조금밖에 안 남아있어서 울고 싶더라. 만춘아, 그날이 최선이었니? 집에 들러서 물이랑 밥이랑 간식이랑 다 챙겨 오고 싶었는데, 너는 야박한 고양이니까 나 오기 전에 또 휙 가버릴 것 같아서 우선 조금이라도 나한테 있는 걸 주기로 했어. 최대한 안 젖은 바닥에 놨지만 금방 빗물에 축축해진 간식을 네가 너무 맛있게 먹어서 마음이 안 좋더라. 먹으면서도 차 소리가 날 때마다 도망갈 태세라서 다 먹을 때까지 네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기로 했어. 너 밥 먹는데 맞은편에 앉아서 계속 여명이 흉본 거 미안해. 여명이 잘 큰 모습 보여주고 싶었는데, 우산 받치고 사진을 찾을 수가 없어서 네 사진만 몇 장 찍었어. 전에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사진을 못 찍어둔 게 나중에 생각하니까 아쉬웠거든.

네가 간식을 다 먹어가니까 나도 마음이 급하더라. 집에 가서 이것저것 챙겨 오고 싶은데 그 5분 남짓을 네가 얌전히 기다려줄까. 나 진짜 금방 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했는데 네가 제대로 알아들었을까. 후다닥 집에 들러서 간식이랑 그릇이랑 챙기니까 이번에는 여명이가 놀라더라. 빨리 자기 안아 들고 이뻐하라고 야옹야옹 난리가 났는데, 밖에 너네 엄마 있으니까 잠깐만!!!! 하고 번개같이 뛰어나왔어. 그렇게 급하게 왔는데도 벌써 너는 가고 없더라. 내가 기다리라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했는데 어쩜 그렇게 3분 만에 휙 가버릴 수가 있니. 여명이 성질 급한 거 다 너 닮은 거 같아 만춘아. 허탈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는데 우리 건물 앞에 도착하니까 여명이 고함이 건물 바깥까지 들렸어. 나 회사 갈 때는 얌전히 놔주는데 이런 식으로 후다닥 나간 게 처음이라 화가 단단히 났더라구. 목청이 어찌나 좋은지 집에 호랑이가 있는 줄 알았어. 만춘아 아무래도 너 부부젤라를 낳은 것 같아.

성질도 목청도 대단한 김부부젤라 씨

해주고 싶은 건 많았는데 아무것도 못해줘서 아쉽지만 네가 살아있다는 게 너무 기쁘더라. 우리 동네 할머니가 오해를 단단히 하셨나봐. 이렇게 슬그머니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나타나면 너 죽었다고 울면서 청승 떤 나는 뭐가 되니. 느끼한 제목으로 구구절절 너한테 보내는 편지까지 여기 올린 나는 어떡하니. 그거 사람들 꽤 많이 읽었단 말이야. 근데 그게 뭐가 대수겠어. 네가 살아 돌아왔는데. 난 괜찮아. 내 사주에 망신살이 두 개나 있다더라. 좀 창피하면 되지. 집에 와서 여명이한테도 너 만났다고 얘기해줬어. 여명이는 내가 자기 안 안아주고 나갔다고 그날 3시간 정도 삐져있었어. 여명이 성격이 저 모양인 건 이제 네 탓이 아니라 내 탓인 것 같아. 네가 2개월, 내가 8개월 키웠으니까.

내가 처음으로 이름을 지어준 봄 고양이 만춘아. 우리 동네로 다시 돌아온 거 환영해. 너랑 만날 때는 항상 그게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걸 나는 이번에 새삼 느꼈어. 앞으로는 언제 너를 만나도 아쉽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다닐게. 꽃이 많이 피니까 부쩍 네 생각이 많이 났었어. 올해는 이 벚꽃을 만춘이가 못 보겠구나... 하면서 슬펐는데, 네가 또 꽃을 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건강한 너를 오래오래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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