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이제 불주먹을 곁들인
고양이들이 원래 다 그런지, 여명이가 유독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진작 어른이 된 여명이는 아직도 어리광이 점점 늘고 있다. 예전 아기 고양이 시절에는 넘치는 기운을 어쩌지 못해서 막 들이대는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뭔가 원하는 바가 있어서 필요할 때 적당히 어리광을 부리는 느낌이다. 다만, 예전에 비해 어리광도 애교도 많아졌지만, 그 타이밍을 가늠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대중없이 자기가 내킬 때인 것 같기는 하지만, 몇 달 관찰해보니 어리광을 부리는 타이밍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밤에 잘 때랑 나랑 놀고 싶을 때.
저녁을 먹고 나서 자기 전까지는 나랑 서로 따로따로 자기 할 일을 하다가, 자려고 불을 끄면 여명이는 그때부터 어리광쟁이가 된다. 추운 겨울에는 이 어리광이 몇배로 더 심해진다. 자려고 누우면 슬그머니 이불에 들어와서 내 다리 근처에 자리를 잡는 여명이 덕분에 지난겨울에는 전기매트 없이도 밤새도록 따뜻했다. 여름에는 살짝 버거운 여명이 체온이 겨울에는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다만, 침대에 가로로 눕거나 아기 고양이 시절처럼 자꾸 배나 다리 위로 올라오는 건 좀 봐줬으면 좋겠다. 가끔 자다가 6kg짜리 따끈따끈 털뭉치 때문에 다리가 저려서 깰 때가 있다. 옆구리쯤에서 자주면 제일 좋은데, 여명이는 기를 쓰고 배든 다리든 기어올라와서 잔다. 정말 지독한 고양이다 싶으면서도 이것도 일종의 어리광인 것일까 하면서 슬슬 웃을 때가 더 많다.
잘 때 말고 여명이가 어리광을 부릴 때는 놀고 싶을 때다. 점점 노는 방식도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느낌이라서, 사냥놀이를 하고 싶을 때는 장난감을 넣어놓은 곳 앞에 앉아서 야옹야옹 울면서 곁눈질로 나를 흘끔흘끔 본다. 내가 장난감을 안 꺼내 주면 어떻게 하는지 보고 싶어서 내가 모르는 척하면 내 다리를 몇 번 긁으며 관심을 끈다. 알아들어놓고 이러기냐는 느낌으로 눈으로 욕을 할 때도 있다. 못 이기는 척 장난감 서랍 쪽으로 가면 내가 걸려 넘어질 지경으로 다리에 머리를 문지르면서 따라온다. 아기 고양이 때는 장난감으로 노는 걸 더 좋아했는데, 요즘은 나랑 직접 뛰어노는 것도 좋아하는 것 같다. 내가 책상에 앉아서 뭘 하고 있거나 바닥에 앉아서 영상을 보고 있을 때 나랑 놀고 싶으면 정말 사람처럼 와서 등이나 어깨를 툭툭 친다. 내가 아는 척을 해주면 내가 보고 있는 화면이나 책 앞에 가서 벌렁 눕거나 내 턱에 머리를 부딪히거나 하며 관심을 끈다.
그때부터 놀이가 시작되는데, 여명이는 물고 나는 떼어내는 단순한 방식으로 거의 30분을 논다. 매번 그렇게 노는데 한 번도 나랑 여명이가 격렬하게 놀고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생각보다 우리가 박진감 있게 놀고 있다는 건 우리 둘이 노는 장면을 동생이 캡쳐한 걸 보고 알았다. 나름 다정하게 깔깔 웃으면서 놀고 있었는데, 웃고 있었던 건 나뿐이었나 싶어서 충격을 받았다. 사진마다 여명이는 눈을 세모로 뜨고 전력을 다해서 나랑 치고받는 중이었다. 무는 것도 그렇게 세게 물지 않았고, 내가 밀어내는 것도 살살 머리를 떼어내는 정도였는데, 캡쳐로 보니 여명이는 둘도 없는 맹수고 나는 고양이 학대범 같은 느낌이었다. 앞으로는 좀 더 강도 조절을 해야겠다 싶었다.
여명이가 놀자고 보채기 전에 나에게 보내는 사인이 있다. 내가 지난 일력으로 꾸며준 종이 숨숨집 안에서 잠을 자다가 슬금슬금 머리를 밖으로 빼고 나를 쳐다보기 시작하면 놀고 싶어진 거다. 아직 머리만 나와있을 때는 살짝 모르는 척해도 되지만, 다리 하나가 더 나오면 더는 무시하기가 어렵다. 한쪽 팔로 운전하는 아저씨처럼 여명이는 한쪽 다리를 숨숨집 밖으로 빼고 나를 한참 쳐다본다. 보통은 저 시선이 점점 부담스러워질 때쯤 내가 못 이기는 척 놀자고 해주지만, 계속 모르는 척하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버텨본 적이 있다. 등을 돌리고 앉아서 여명이 몰래 숨숨집 쪽을 촬영하고 있었더니 여명이는 꼭 무기 관리를 하는 것처럼 앞발 그루밍을 시작했다. 그루밍을 싹싹하더니 밖으로 나와서 나한테 슬슬 다가왔다. 내가 이제 그만 찍고 도망가야 하나 고민을 시작하기가 무섭게 여명이는 싹싹 그루밍한 앞발로 내 등을 팍 쳤다. 체중을 실어서 제법 야무지게 치는 여명이를 보면서 앞으로는 절대 무시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어리광이 많아진 여명이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는데, 왜 내가 맞은 이야기로 끝이 났는지는 모르겠다. 아기 고양이 때 무는 힘 조절을 못해서 내 다리와 동생 다리를 울긋불긋하게 만들었던 여명이는 이제 제법 어른이 되었다. 요즘도 물기는 하지만 예전처럼 막무가내로 물지는 않고 어리광을 섞어 힘 조절을 하며 무는 느낌이다. 사실 예전이랑 똑같이 물고 있는데 내가 희망회로를 돌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2년 가까이 같이 살았으면 당연한 일일수도 있지만, 여명이가 어리광을 부릴 때마다 그래도 나랑 같이 사는 게 마음이 편해졌나 보다 싶어서 안심이 된다. 여명이가 앞으로도 지금처럼 나한테 마음 편히 어리광을 부리면서 (하지만 좀 덜 물면서) 몸과 마음 모두 편하게 오래오래 함께 살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