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는 건 내가 할게, 찾는 건 누가 할래?
여명이의 장난감 취향은 한결같다. 어릴 때부터 돈으로 산 장난감보다는 주로 방 안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물건들을 더 좋아했다. 병뚜껑이나 두루마리 휴지심, 집게핀 같은 것들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좋게 말하면 소박하고 어떻게 보면 살짝 궁상맞기도 한 장난감들을, 여명이는 꼭 집사와 함께 가지고 놀고 싶어했다. 병뚜껑 캐치볼이며 휴지심에 숨겨놓은 간식 찾기 같은 놀이를 자주 했고, 요즘도 종종 한다. 여명이가 가장 신날 때는 나와 동생에게 병뚜껑 캐치볼을 시켜놓고, 중간에 병뚜껑을 인터셉트하는 순간이다. 그런 취향이라서 집사가 집을 비울 때 쓸 수 있도록 만들어진 움직이는 장난감이나 자동 장난감에는 관심이 통 없다. 그래서 나는 여명이와 함께 있는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이 놀아주려고 한다.
이사를 오고 나서 여명이가 좋아하는 놀이의 순위 변동이 좀 있었다. 요즘 여명이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는 숨바꼭질이다. 집 안의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이 놀이에는 장난감이 전혀 필요하지 않고, 오직 집사의 연기력만 필요하다. 여명이는 아주 시끄럽게 숨어있는 편인데, 목소리보다는 꼬리가 시끄럽다. 누나가 언제 찾으러 올지 조마조마한 마음이 꼬리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렇게 숨은 티를 팍팍 내면서 뻔히 보이는 곳에 숨은 여명이를 혼신의 힘을 다해 찾는 연기를 하는 건 내 몫이다. 여명이가 어딨지? 여명이가 어디 갔지? 하면서 두리번거리면 여명이는 신나서 어쩔 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20번 미만으로는 절대 끝나지 않는 숨바꼭질을 마치고 나면 몸이 피곤한 게 아니라 목이 지치는 느낌이다.
숨바꼭질을 좋아하는 것에 비해 여명이는 요령도 성의도 별로 없다. 여명이가 자주 숨는 장소는 세 곳 정도다. 이불속, 행거, 그리고 방 문 뒤편. 언뜻 공통점이 없을 것 같은 세 곳의 유일한 공통점은 여명이가 숨었을 때 너무 눈에 잘 띄는 곳이라는 거다. 처음에는 너무 성의 없이 숨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여명이는 머리만 숨기면 자기가 안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 중에서 가장 알기 쉬운 곳은 이불속이다. 이불속에 숨은 여명이를 보면 지금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을 때가 많다. KTX를 타고 가면서 봐도 이불속에 살아있는 뭔가가 있다는 걸 알 정도로 티 나게 숨어 있지만, 나는 최소 5분 이상 품을 들여 천천히 여명이를 찾아줘야 한다. 내가 주변 이불을 통통 두드리면서 여명이를 부르면 숨어있던 여명이가 신이 나서 움찔움찔하는 게 보이는데, 귀엽기도 하지만 지금 뭐 하는 건가 싶은 현타가 올 때도 있다.
원피스나 긴 코트가 걸린 행거 아래에도 종종 몸을 숨기는데, 그때는 평소보다 좀 더 빨리 찾아야 한다. 찾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여명이가 내 옷에 털을 더 격렬하게 묻혀서, 내가 돌돌이로 털을 떼어내는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이다. 이사 오고 나서 여명이에게는 숨을 장소가 한 군데 더 늘었는데 바로 문 뒤다. 나랑 같이 줄곧 원룸에 살았던 여명이는 이사 오고 나서 방과 거실을 분리해주는 문이 영 신기한 모양이었다. 숨바꼭질을 할 때 문틈으로 나를 관찰하면서 숨을 수 있어서 여명이가 자주 숨는 곳이 되었다. 여기에 숨어도 꼬리는 여전히 신이 나있어서 문 뒤에 숨은 여명이 꼬리가 문 아래 틈으로 계속 왔다 갔다 한다. 그걸 보면서 열심히 찾는 시늉을 하고 있자면 기가 막힐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숨어있는 여명이를 내가 찾으면 그때부터는 여명이가 술래가 되어야 하는 게 룰인데, 한 번도 지켜진 적이 없다. 여명이가 이걸 어디서 좀 잘못 배워왔는지, 숨바꼭질로 시작했던 놀이는 항상 술래잡기로 마무리가 된다. 내가 찾았다!를 외치면 숨어있던 장소에서 호다닥 뛰어 나가서 다른 곳에 다시 숨는다. 이제 네가 술래라고, 누나가 숨을 테니까 네가 찾아야 한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다. 나도 한 번쯤은 숨어보고 싶어서 방법을 찾았다. 여명이를 발견하고 나서 여명이보다 더 빠르게 호다닥 뛰어나가서 숨는 것. 여명이는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지 일부러 안 찾는 건지 내가 어디에 숨어있는지 뻔히 알면서 찾으러 오지 않는다. 그러다가 얼른 찾아줘야 놀이를 계속할 수 있겠다 싶으면 어쩔 수 없이 터덜터덜 나를 찾으러 와주기도 한다. 하지만 보통은 사실상 술래가 없는 상태로 서로 찾으러 오기를 기다리며 대치중일 때가 많다.
내가 먼저 숨는 데 성공해서 여명이가 찾으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은근히 두근두근한다. 그럴 때면 여명이가 왜 이 놀이를 이렇게 좋아하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나도 여명이가 좋아하는 문 뒤에 자주 숨는데, 여명이가 너무 오래 찾으러 오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지루함에 지쳐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보면 언젠가 여명이가 나를 영영 찾으러 오지 못하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어느 미래를 떠올리게 된다. 찾으러 와줄 여명이가 없는 내 삶에 대해 아주 잠깐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바닥까지 가라앉는다. 하지만 반대로 찾으러 와줄 내가 없는 여명이의 삶을 떠올리면 내가 기다리는 입장인 것이 훨씬 낫다는 결론에 이른다. 쓸데없는 망상을 한참 하다가 내가 조금 울컥한 상태로 거실로 나가보면 여명이는 이미 잠을 자고 있거나, 태연하게 그루밍을 하고 있을 때가 많다.
여명이 없이 살았던 시간이 훨씬 긴데도, 이제는 여명이 없는 삶에 대해 생각하면 그저 막막하다. 어쩌자고 덥석 얘를 데려와서 같이 살 결심을 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지금 다시 여명이를 처음 만난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나는 같은 선택을 할 테니, 오지 않은 미래를 너무 걱정하기보다 여명이랑 같이 있는 지금 더 즐겁게 살기로 다짐하곤 한다. 여명이에게 주어진 시간을 천천히 다 쓸 수 있도록, 그 시간을 즐거움으로 채워줄 수 있도록 내가 더 노력해야겠다. 지금처럼 내가 계속 술래만 한다 해도, 간혹 술래 없이 대치하는 상태가 된다 해도, 우리의 숨바꼭질이 오래오래 이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집사 누나의 서글픈 생각이 너무 길게 이어지지 않도록, 숨쉬듯이 망상하는 누나를 여명이가 조금 빨리 찾으러 와주면 좋겠다. 쓰다 보니 바라는 게 너무 많은 것 같지만, 여명이가 양심적으로 10번에 1번 정도는 확실하게 술래를 맡아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