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이는 한 놈만 팬다
고양이들이 모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여명이는 사람이든 장난감이든 호불호가 아주 뚜렷한 고양이다. 여명이가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에 딱 두 명이다. 집사인 나, 그리고 여명이 1호 팬인 내 동생. 이 둘을 제외한 사람이 집에 들어오면 그때부터 구석에 숨어서 나오지 않는다. 쫄보라서 그런지 현관문 밖에 사람 기척이 느껴지면,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그때부터 경계를 시작한다. 누가 초인종을 누르기라도 하면 구석으로 번개같이 뛰어들어가서 한동안 나오지 않는다. 가스 검침이 있는 날은 구석에 숨어서 쉬지 않고 '저 사람 나가라고 해!!!!!' 느낌으로 우우우웅하며 심기불편한 소리를 냈다. 검침하러 오신 분이 보이지는 않아도 집에 고양이가 있긴 한가 보다며 웃으셨다. 그분이 나가신 뒤에도 여명이는 한참 노여움을 풀지 않았다.
장난감은 조금 더 복잡하다. 사실 아직 여명이가 장난감을 좋아하는 기준을 잘 모르겠다. 사실 처음 데려왔을 때도 특이한 취향으로 나를 당황하게 했었다. https://brunch.co.kr/@dawnym/8
돈으로 산 장난감에는 관심이 눈곱만큼도 없었던 여명이를 임보 누나의 경제적인 사정까지 고려해주는 기특한 고양이라고 생각했었다. 요즘은 장난감도 잘 가지고 노는데, 취향을 맞추는 게 쉽지 않다. 가끔 취향 저격 장난감을 발견하면 아주 끝장을 본다. 낚싯대 끝에 달려있었던 쥐 인형은 솜이 다 튀어나올 때까지, 데빌 스네이크는 한 올 한 올 풀리다 못해 형체가 다 사라질 때까지 집요하게 가지고 놀았다. 장난감을 곧잘 가지고 노는 요즘도 기본적인 성향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제법 거금을 주고 산 캣닙공 보다 페트병 뚜껑을 더 좋아한다.
아무래도 여명이는 뚜껑을 얻어내려고 생수병 속 물의 양을 체크하는 것 같다. 내가 병에 물을 조금 남기면 다 먹으라는 듯이 싱크대에 앉아서 지켜보고 있다. 내가 물을 남기기라도 하면 나무라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누나 물 많이 마시고 건강하라고 이러는 건가 싶을 정도로 내가 생수병만 열면 난리가 났다. 뚜껑이 생기면 그때부터 우리의 심플한 놀이가 시작된다. 내가 뚜껑을 던지면 여명이는 강아지처럼 나한테 다시 물어오고 나는 그걸 다시 던진다. 그리고 그 뚜껑이 어딘가 손이 닿지 않는 구석으로 사라질 때까지 우리는 그 놀이를 영원히 해야 한다. 모르긴 해도 내 작은 방구석구석에는 안 보이는 병뚜껑이 최소 50개는 숨어있을 거다.
또 다른 여명이 픽은 종이봉투다. 아무 봉투나 좋아하는 건 아니다. 자기 취향의 크기와 두께가 있어서 거기서 조금만 벗어나도 본체만체한다. 지금까지 본 중에 여명이의 취향을 가장 만족시킨 건, 내가 종종 배달을 시키는 샌드위치 전문점의 종이봉투다. 종이봉투만 던져주는 걸로는 끝나지 않는다. 적당히 구멍을 뚫어서 그 사이로 장난감 잡기 놀이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한다. 그리고 여명이가 질릴 때까지 종이봉투에 숨은 여명이를 찾는 시늉을 해줘야 한다. 적당히 하면 노여워하기 때문에 박진감 넘치지만 여명이가 놀라지 않는 선에서 찾는 시늉을 해줘야 한다.
여명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져봤을 장난감인 빨간 쥐돌이통은 여전히 부동의 1위다. 쥐돌이는 이제 꼬리도 없고 털도 많이 빠져서, 넋이라도 있고 없고 상태다. 일단 쥐돌이의 형체가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때 버리고 새 걸로 사줄까 싶기도 했는데, 왠지 여명이가 좋아하는 쥐돌이는 지금 그 쥐돌이인 것 같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여명이가 좋아하는 장난감(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를 물건들)에는 같이 놀아줄 누나가 필요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쯤되면 여명이는 장난감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나를 좋아하는 거라고 흡족한 결론을 냈다. 지금처럼 손 많이 가는 고양이여도 괜찮으니까 건강하게만 잘 자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