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갔다 돌아오면 야옹야옹야옹
지난여름에 이사를 하고 나서 벌써 네 계절을 모두 겪었다. 처음에는 이 집에 절대 적응을 못할 것처럼 보이던 여명이는 어느새 이 집에서 태어난 고양이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 나보다 이 집에 대해 더 속속들이 잘 아는 느낌이라서, 내가 잘 모르는 구석에 장난감을 숨겨놓거나 자기가 숨기도 하며 우리 집을 200% 활용 중이다. 여명이가 생각보다도 더 일찍 적응을 마친 건 여명이의 적응력이 좋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사를 했던 그 해 여름부터 나는 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 무렵 다니던 회사는 야근이 잦았고, 그것도 내가 예측할 수 없는 갑작스러운 일이 터져서 야근을 하게 되는 일이 많았다. 통근은 편도 1시간이 걸려서 여명이가 혼자 집을 지키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어느 바쁜 시기에 야근이 몰리는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대표의 변덕으로 야근이 잦아지는 건 참기가 어려웠다. 프리랜서를 하더라도 나랑 여명이랑 둘이 먹고살 수는 있겠지,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이사를 며칠 앞둔 어느 날 퇴사했다.
집에서 시간을 자유롭게 쓰며 교정지를 들여다보는 생활은 생각보다 쾌적했다. 사업계획, KPI 같은 말들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로 그냥 내 앞에 있는 문장들을 다듬기만 하면 된다는 게 즐거웠다. 여명이의 만족도도 높아 보였다. 아침 일찍 나갔다가 밤늦게 들어와서는 집에 있는 짧은 시간을 거의 잠으로 채우던 내가 하루종일 집에 같이 있어서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것 같더니 점점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점심때부터 늦은 오후까지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는 거실에서 낮잠을 자거나 놀고 있는 여명이 옆에 앉아서 일을 하는 시간이 정말 행복했다.
그렇게 만족도가 높았지만 해가 바뀐 1월부터 나는 다시 직장인이 되었다. 집에서 일하는 시간이 그렇게 행복했는데도 다시 회사로 돌아간 이유는 나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이 돈을 벌 수 있는 시간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회사를 다닐 때는 퇴근 후 시간에 일 생각을 지우고 여명이와 시간을 보내거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프리랜서의 시간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겠지만, 나는 일과 생활의 분리가 쉽지 않았다. 여명이랑 사냥놀이를 하는 동안도 일을 하나 더 받아서 처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모든 생각의 밑바탕에는 언젠가 일이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일이 들어올 때 놓치지 않고 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있었다. 장단점을 저울질해 보니 일과 생활을 분리할 수 있는 환경이 나에게는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결국 겨울이 시작될 무렵 다시 취업 준비를 시작해 운 좋게 원하던 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
새로운 직장은 다시 공공기관이다. 한적하고 경치 좋은 곳에 위치한 연구기관에서 인문, 역사 분야의 책을 만드는 일을 맡았다.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운이 좋았다. 마침 다시 회사원이 되려고 마음을 먹은 그 시점에 아주 오랜만에 이 기관의 채용공고가 났고, 입사 후에 알고 보니 그 자리는 정년 퇴임을 한 직원의 공석이었다. 좋아하는 분야의 책을 만들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좋다. 부서원들 모두가 책 만드는 일을 오래 해온 베테랑들이라서 나만 잘하면 되는 환경이고, 상사도 동료들도 어렵기는 하지만 불편하지는 않아서 하루하루 적당히 긴장되고 적당히 편안한 마음으로 일을 하고 있다. 이 좋은 회사의 유일한 단점은 통근거리다.
우리 집에서 회사까지는 넉넉잡아 1시간 40분 정도가 걸리는데, 오랜만에 서울에서 경기도로 광역버스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배차 간격이 제법 길어서 왕복 3시간을 길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 시간을 오디오북을 듣거나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일들을 하는 데 활용하며 알차게 쓰고 있어서 아깝지는 않은데, 여명이한테는 미안한 일이 되었다. 여명이는 작년 하반기 내내 하루 24시간을 나와 함께 있다가 갑자기 올해부터 다시 하루의 절반을 혼자 지내게 되었다.
다행히 이번 회사는 업무 시간에는 바쁘지만 야근은 거의 없고, 출퇴근 시간을 스스로 정할 수 있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서 한바탕 노는 여명이의 생활패턴과 도로 교통 상황을 고려해 일찍 출근했다가 일찍 퇴근하기로 했다. 내 이른 출근시간 때문에 우리 집의 하루는 아침 5시에 시작된다. 여명이의 밥을 챙기고 화장실을 치우고 조금 놀아주다가 출근 준비를 하고 6시에는 집을 나선다. 그리고 다시 집에 돌아오는 건 저녁 6시다.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리기 전에 여명이는 이미 방묘문 앞에 와서 대기하고 있다가 내가 걸려 넘어질 지경으로 내 다리에 꼬리를 감고 야옹야옹 운다. 날마다 반복되는 퇴근인데도 여명이는 하루도 빠짐없이 몇십 년 만에 다시 만난 혈육을 보듯이 반겨준다.
올해 다시 회사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집에 펫캠을 설치했다. 내가 없는 동안 여명이는 아마 10시간 이상 잠을 자겠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언제든 들여다볼 수 있도록 카메라를 달기로 한 거였다. 점심시간에 카메라를 켜보면 열에 아홉은 햇볕이 쏟아지는 평화로운 거실에서 여명이는 세상모르고 낮잠을 자는 장면을 보게 된다. 여명이 팔자가 상팔자라고 투덜투덜하면서도 혼자 잘 있는 모습에 안심이 되기도 했다. 여명이가 짠해지는 건 내가 퇴근할 무렵부터다. 해가 슬슬 기운다 싶으면 여명이는 우리 집에서 현관이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앉아서 현관문을 오래오래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도착하기 전까지 현관문을 보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복잡했다.
여명이와 내가 모두 만족하려면 집에서, 혹은 집에서 아주 가까운 회사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할 텐데 그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는 곳을 찾을 수 있을까 싶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곳을 찾거나 내가 그런 곳을 직접 만들 수 있을 때까지 여명이와 조금씩 양보해 가며 쾌적하게 생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지금도 여명이와 보내는 시간은 소중하지만 시간이 많이 흘러서 여명이가 할아버지 고양이가 되면 1분 1초가 더 소중하게 느껴질 테니, 그때는 여명이와 계속 함께 붙어 지내면서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우리 집 얼룩 고양이가 더 이상 나를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기지 않아도 되는,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