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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명 Oct 27. 2020

다녀왔어, 어서 와

마중은 있지만, 배웅은 없는 고양이

당연한 이야기지만 여명이와 함께 살면서 내 생활은 알게 모르게 많이 달라졌다. 원래도 집순이였지만, 퇴근 후에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크게 불편한 점은 없지만, 책을 읽을 시간과 혼자 조용히 뭔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다. 여명이는 내가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는 큰 불만이 없어 보였지만, 책을 꺼내 들면 죽자고 달려들어 박박 긁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책은 다 자기 스크래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요즘은 드라마나 영화를 틀어놓고 여명이가 내 무릎에 올라와서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여명이가 완전히 잠들면 조용히 책을 읽어야 했다. 독서가 이렇게 스릴 있는 취미가 될 줄은 몰랐다. 내가 노트북으로 뭔가를 할 때도 여명이는 큰 불만이 없다. 그냥 내 다리 위에서 한껏 애교를 부리다가 잠이 든다. 달라진 점을 들자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가장 큰 변화는 현관을 나설 때와 들어설 때 인사를 하게 되었다는 것.

노트북으로 뭔가를 하고 있으면 다리에 기대서 애교 부리는 여명이

처음 만났을 때는 세상 쿨한 고양이였던 여명이는 요즘 애교쟁이가 되었다. 처음 내 방에 왔을 때는 내가 외출하거나 말거나 크게 신경을 안 썼는데, 요즘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 내 발소리를 아는 건지, 아니면 내가 번호키 누르는 소리에 뛰어나오는 건지 모르겠는데 현관문을 열면 방묘문 앞에 앉아있다. 누나 다녀왔다! 하면 그때부터는 야옹야옹 난리가 난다. 요즘 부쩍 수다쟁이가 된 여명이는 내가 잠깐 손을 씻는 동안도 다리에 머리를 비비면서 쉴 새 없이 야옹야옹 수다를 떤다. 걸음을 떼기가 어려울 정도로 다리에 엉겨 붙고, 들어 올려서 안으면 골골거리는 소리가 거의 오토바이 소리처럼 크게 울린다. 이렇게 사람 좋아하는 고양이가 10시간 가까이 혼자 있었다고 생각하니 새삼 짠하고 안쓰러웠다. 어디를 다녀오든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30분은 무조건 여명이를 예뻐해 주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양껏 예쁨을 받고 나면 여명이는 자기 화장실을 앞발로 툭툭 친다. 꼭 치우라고 시키는 것 같아서 기가 찬다. 투덜투덜하면서도 나는 똥삽을 들어야 한다. 나는 힘이 없다.

마중은 이렇게 야무지게 하는 고양이지만, 배웅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내가 겉옷을 입기 시작하면 외출하는 걸 아는 것처럼 다리에 머리를 막 비비면서 진로 방해를 한다. 요리조리 피해 가며 외투까지 입어도 여명이는 포기하지 않는다. 여명이가 체념하는 순간은 내가 마스크를 꼈을 때다. 마스크를 끼면 곧 나간다는 걸 아는 것처럼, 생각보다 똘똘한 고양이는 그때부터 나한테서 등을 돌린다. 아무리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뚱땅뚱땅 구석으로 걸어가서 자기 숨숨집에 숨어버린다. 숨숨집 밖으로 조금 나온 꼬리에 대고 나는 다녀올게!를 열 번 정도 하고 나서 현관문을 닫고 나간다. 다시 현관문이 열릴 때까지 여명이는 혼자서 시간을 보내야 하고, 나도 여명이도 그게 썩 내키지 않는다.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회사로 이직을 해야 할지, 매일 아침 출근하면서 생각한다.

여명이도 그렇겠지만 나도 현관문을 닫고 나가는 것보다 열고 들어오는 순간이 더 좋다. 방묘문 너머로 여명이의 동그란 얼굴이 보이면 일을 마치고 무사히 집에 돌아왔다는 게 실감이 난다. 원래도 퇴근하고 나서 곧장 집으로 오는 편인데, 요즘은 여명이 생각에 발걸음을 더 재촉한다. 다 못 찬 굴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모랫길을 달려오는 섬집아기 엄마의 마음을 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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