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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명 Nov 18. 2021

자는 척하는 고양이와 안 자는 척하는 누나

의욕만 앞서는 1인1묘의 사냥놀이

여명이와 함께 보내는 두 번째 가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래 봐야 1년이 지났을 뿐인데도 그 전의 가을과는 여러 가지가 달라졌다. 내 변화는 임보 누나에서 집사가 된 정도지만, 여명이는 체격부터 행동까지 모두 작년 가을과는 다른 고양이가 된 것처럼 달라졌다. 500그램이 될까 말까 하던 안쓰러운 아깽이는 이제 5.7kg의 거대 고양이가 되었다. 작년에는 여명이를 볼 때마다 얘는 얼굴도 작고 발도 작고 다 작네, 라며 안쓰러워했었는데, 이제 덩치고 발이고 머리고 다 커졌다. 이렇게 덩치가 커졌는데도 아직 아기 고양이 때 버릇을 못 고치고 가끔 내 배 위에 올라와서 잠이 든다. 예전에는 배에 여명이를 얹고도 잘만 잤는데, 이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이라서 그럴 수가 없다. 내가 무거워서 몸이라도 살짝 뒤척이면 언짢아하는 여명이를 보면 기가 찬다. 솜털 같았던 고양이는 어딜 가고 물먹은 솜 같은 덩치가 나타나 이렇게 눈치를 주나 싶어서.

그 정도로 무겁지는 않잖아...

체격만 변한 게 아니다. 매일 새벽 혼자서 파티를 벌이며 나를 한두 시간 간격으로 깨우던 여명이는 이제 아침 5시까지는 나랑 같이 자거나, 혼자 조용히 논다. 여명이가 나를 봐주는 건 아침 6시무렵까지다. 그 이후에는 내가 아무리 자는 척을 해도 소용이 없다. 내 머리맡에 와서 처음에는 머리를 슬슬 건드려보다가 안되겠다 싶으면 귀에 대고 사이렌처럼 운다. 상황이 그 지경이 되면 나는 잠이 깬 척을 해야 한다. 내가 일어난 것 같으면 여명이는 또 내 배 위에 척척 올라와서 자리를 잡는다. 나는 눈도 못 뜬 채로 아이 예쁘다를 해주고 여명이는 내내 골골거리면서 만족스러워한다. 한 30분쯤 그러고 있으면 그제야 내 알람이 울린다. 여명이는 그 알람이 자기 아침 식사 알람인 줄 아는 것 같다. 알람이 울리면 폴짝 뛰어내려 가서 자기 밥그릇 앞에 앉아서 울기 시작한다. 내가 알람을 끄고도 안 일어나면 다시 머리맡으로 쪼르르 온다. 안 일어날 재간이 없다.

다시 눕는 건 절대 안 돼!

달라진 건 또 있다. 예전에는 사냥놀이를 시작하면 최소 30분은 쉬지 않고 놀았는데, 이제 여명이도 체력 안배를 하는 느낌이다. 퇴근하고 돌아와서 길게 한 번만 놀아주는 것보다는 짧게 여러 번 놀아주는 게 더 자기 취향인지, 조금 놀다가 금방 쉬려고 한다. 나는 길게 한 번 노는 게 편해서 가끔 여명이가 쉬고 있어도 더 놀자고 보채 본다. 내가 그렇게 보채면 못 이기는 척 다시 일어나서 놀아주기도 했는데, 요즘은 여명이도 꾀를 부린다. 바닥에 척 누워서 내가 포기할 때까지 자는 척을 한다. 처음에는 진짜로 자는 줄 알았는데, 실눈을 뜨고 상황을 살피다가 나한테 들킨 적이 있어서 그 뒤로는 안 속아 준다. 아침에는 내가 안 자는 척을 하고 저녁에는 여명이가 자는 척을 한다. 아침에 나를 깨우는 여명이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다.

아 자는 척 아니라고...

서로 자는 척 안 자는 척을 주고받으면서 지내고는 있지만, 여명이의 아기 시절을 생각하면 요즘은 태평성대라고 할 수도 있겠다. 24시간 항상 눈빛이 은은하게 돌아있었던 아기 여명이는 놓친 고무줄처럼 방 안을 뛰어다녔었는데, 점점 차분해지더니 이제는 사냥놀이에 완전히 열중했을 때만 그렇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명이도 나도 체력이 좋은 편이라 퇴근 시간에는 둘이 놀다 보면 다른 일을 할 시간이 별로 없다. 시계를 볼 줄 아는 것도 아닐 텐데, 여명이는 시간 배분을 잘한다. 한 10분쯤 놀면 슬슬 자는 척을 하려고 폼을 잡는다. 나는 내 할 일을 여명이가 자는 척하는 틈을 타서 다 해야 한다. 자는 척을 잠깐 하다가도 내가 움직이는 소리가 나면 번개같이 뛰어와서 또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밀착 관찰을 하니까 빠르게 다 끝내야 한다. 운이 좋으면 자는 척하던 여명이가 진짜로 잠들 때도 있다. 그러면 나는 좀 더 오래 자유 시간을 누릴 수 있다.

가끔 너무 피곤할 때는 아침에 일찍 나를 깨우려는 여명이를 보면 얘는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내 잠을 방해할 건가 싶을 때도 있다. 그러다가 작년 가을을 떠올리면서 반성한다. 그때는 통잠을 3시간만 자도 행복하겠다고 했으면서 요즘은 7시간 넘게 푹 재워주는데도 투덜거리다니 사람은 정말 간사하구나... 하면서. 자는 척할 때 내가 집적거리면 짜증 내는 여명이도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겠다. 예전에는 놀자고 졸라야 놀아주던 누나가 이제는 나를 깨워서 놀아주기까지 하다니... 하면서. 절대 그렇게 생각할 리 없겠지만. 아직도 활동 시간대가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1년쯤 같이 사니까 점점 사이클이 맞아가는 게 신기하다.  

아오 좀 잘 때는 그냥 냅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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