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전쟁 이야기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_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한 건 작년 연말부터였는데 정말 오랜 시간을 들여 읽었다. 500쪽이 넘는 책이라서 두껍기도 했지만, 한꺼번에 많이 읽기는 어려운 내용이 많았다. 틈날 때 아주 조금씩 읽다 보니 거의 3개월이 걸렸다. 다 읽기까지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고, 끔찍한 전쟁 이야기를 읽는 중에 진짜 전쟁이 일어날 줄은 더 몰랐다. 책에서는 전쟁의 개괄이나 전술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전쟁 속 사람들, 특히 여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동안 내가 거쳐 왔던 회사 중에는 전쟁기념관도 있다. 그곳에서 전시 콘텐츠들을 연구하면서 나는 여러 번 놀랐다. 전쟁의 역사가 너무나 길었고,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셀 수 없이 많았고, 사람이 사람을 해치려고 만든 무기가 징그럽게 다양하고 치밀했다. 내가 그래도 전쟁에 대해서는 제법 전문 지식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며 책을 집었는데도, 읽으면서 또 충격을 여러 번 받았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동안 전술이나 피해규모, 의의 등으로만 알아왔던 전쟁은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사람의 일이었다. 숫자로만 파악했던 피해자들은 모두 이름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들의 목소리가 담겨있어서 읽는 게 쉽지 않았다.
저자는 전쟁을 겪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엮어서 이 책을 만들었다. 어린 시절에 전쟁을 겪은 사람들은 전쟁 상황이 보통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을 테고, 그 사람들이 느꼈을 감정들이 책에 담겨있었다. 다른 세상이,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진짜 있는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마음이 한없이 무거웠다. 지금도 우크라이나에는 저런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 아이들이 있겠지.
전쟁을 연구하는 데 사용되는 공식적인 자료들 중에는 주로 전술이나 수에 관련된 것이 많다. 어떤 자료를 뒷받침하기 위해 사건과 관련된 사람의 말을 인용하는 경우는 있지만, 구술 자료 그 자체는 쉽게 접하기가 어렵다. 세월이 흐르면서 기억이 조금씩 흐릿해져 정확도가 떨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말과 기억이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지 새삼 느꼈다. 포병, 저격수, 위생병 등 다양한 역할로 참전했던 여성들의 말을 읽으면서 어쩜 이렇게 어제 일처럼 기억을 하는 걸까 싶어서 놀라우면서도 안쓰러웠다. 이 책은 내가 최근 몇 년 사이에 읽었던 어떤 책 보다 말줄임표가 많은 책이었다. 전쟁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기억을 떠올리기 위함인지, 마음을 가다듬기 위함인지 한 문장에 적어도 두세 번은 말줄임표가 필요할 정도로 말을 멈췄다.
처음에는 전쟁 경험에 대해 말을 아끼던, 혹은 아끼도록 강요받았던 사람들도 저자 앞에서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이야기한다. 참전자의 말처럼 전쟁을 떠올리는 것도 끔찍하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 기억에서 사라지는 게 더 끔찍하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가 신뢰하는 ‘고통’의 기억들이 500쪽 넘게 이어져서 책을 읽는 게 정말 쉽지 않았다. 왜 기억을 하는 것도 기억을 하지 않는 것도 끔찍한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전쟁터만큼 죽음과 가까운 곳도 드물지 않을까. 그런데 그 전쟁터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이 살아있는 내내 전쟁의 기억으로 고통받는 걸 책에서 읽고 나니까, 어느 쪽이 더 나은지를 모르게 되었다. 죽은 사람에게도 산 사람에게도 전쟁은 너무 끔찍한 일이었다. 그런 전쟁의 역사들이 많이 쌓였는데도, 2022년에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다.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바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사람들은 전쟁에 익숙해진 모든 걸 다시 되돌리거나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책을 읽는 내내 요즘 전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떠올렸다. 다시 평소처럼 살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러다가 얼마 전 봤던 피난소의 우크라이나 아이들과 불안한 표정의 주인아저씨 품에 안겨서 스트레스로 개구호흡을 하던 고양이 모습이 떠올라서 한참 마음이 아팠다. 예전 같았으면 폭격을 맞은 도시의 참상 같은 것들에 더 충격을 받았을 텐데,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전쟁을 겪어내고 있는 사람들 모습을 먼저 보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러시아는 소녀병까지 모두 동원해서 전쟁에 임했다. 그랬던 러시아와 현재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도 저런 식으로 총력을 다해 러시아에 맞서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마음이 답답했다.
전쟁의 끔찍함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상처가 계속 남아서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데 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한참 동안 하늘을 보지 못했다는 저 사람은 결국 자기 심장을 구할 수 있었을까, 이제 하늘을 볼 수 있을까 하며 계속 마음에 걸렸다. 한 사람의 모든 걸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다는 걸 한참 읽었더니 이제는 전쟁을 단순한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만은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이 책이 있다는 건 출간 당시에 이미 알고 있었는데, 책이 두껍기도 했고 왠지 선뜻 손이 가지 않아서 읽으려고 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이 책의 편집자이기도 한 이연실 작가님의 책을 읽다가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 장바구니에 담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작가님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모두가 기념사진을 찍는 광화문에서, 세월호의 아픔이 남아있는 곳에서는 찍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는 에피소드를 읽었을 때 마음이 움직였다. 다른 사람의 상실이나 아픔에 공감을 깊이 하는 사람이 전쟁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엮어냈을지 궁금했다.
책에는 러시아 사람들의 전쟁 이야기가 담겨있는데, 요즘 우크라이나 상황을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했다. 전쟁을, 그것도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전쟁을 겪은 나라에서 어떻게 먼저 전쟁을 일으킬 수가 있을까. 물론 고통스럽게 전쟁을 겪은 일반인이 일으킨 게 아니라, 늘 그렇듯 원하는 걸 폭력적으로 얻으려는 누군가가 시작했다는 걸 알면서도 답답한 마음이었다. 전쟁터에는 항상 사람이 있고, 동물도 있다. 전쟁이 끝나고 운 좋게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전쟁으로 인한 상처는 오랫동안 그 사람을 괴롭힌다는 걸 책을 읽으며 알았다. 우크라이나를 괴롭게 하는 전쟁이 하루라도 빨리 끝나고, 전쟁이 끝난 뒤에 남은 상처가 사람들을 너무 오래 고통스럽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