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고 연마

열 번째 이야기

by 향다월



1


한적한 강원도 산속 어느 곳에 위치한, 펜션과 호텔 그 중간 즈음의 건물. 그렇기에 그 건물의 붉은 벽돌은 격오지의 처량한 바람을 제대로 받아낼 수도, 이질적인 카리스마로 도회를 연상 지을 수도 없는 애매한 곳이었다. 그 애매함에 이끌려 여기까지 도망친 청년이 한 명 있었다. 청년은 어중간한 건물의 카페 테라스에 앉아 노트북을 째려보고 있었다. 양손은 키보드 위에서 움직이지 못했고, 오므렸다 풀어지는 입술만 그의 복잡함을 벗 삼고 있었다. 청년은 현기증이 나 오른쪽 손에게 잠시 자유를 줘 바쁜 입을 가렸고, 손바닥을 뚫어버릴 듯이 거칠게 한숨을 쉬었다.


"실례지만, 같이 앉아도 될까요?"

불혹 즈음의 남성이 한 손에 커피가 담긴 유리컵, 다른 손에 펜과 노트를 쥔 채 청년에게 멋쩍게 말을 건넸다. 청년의 왼손은 그제야 자유가 되었다. 청년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쁘신 와중에 죄송합니다, 사람이 워낙 많아서..."


청년은 주위를 둘러봤다. 테이블을 꽉 채운 그들은 다 보였다. 가족, 친구들, 연인들. 어떤 목적으로, 어떤 사람들끼리 왔는지 하나같이 전부 보였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이 사이가 좋은지, 연인이라면 불륜인지 아닌지, 가족의 경제적인 여유까지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년과 남성이 유일했다. 보이지 않는, 혼자 온 사람들은 그들뿐이었다. 청년은 차라리 남성에게 자기 테이블을 양보하고, 아무 손님들 자리에 앉아 그들에 붙어 조금이라도 보이면서 그들을 살펴볼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러나 본인은 지금 그럴 때가 아니고, 그럴 사람이 아니기로 했기 때문에 관뒀다.


"물론이죠. "

청년은 자기 맞은편에 놓았던 가방을 치우며 남성에게 자리를 권했다.


"감사합니다, 서로 조용히 작업이나 하죠."

남성은 고개를 짧게 숙이곤 노트를 펼치며 씨익 웃고는 말했다.


"그 작업이란 게 정확히 무슨 말인가요?"

청년은 괜히 추궁이라도 당한 것처럼 아주 조금 촉촉해진 눈시울로 남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글이지 않습니까? 산문인지, 운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문학이 아닐 수도 있겠군요."

남성은 당황하지 않고 노트에서 시선을 올리고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답했다.


"제 노트북 화면을 보셨습니까? 어떻게 그걸 알 수 있죠?"

"그거야 노트북을 보고 계신 그쪽을 보면 알 수 있죠."

청년은 다소 어이가 없었는지 혀를 차는 발음으로 질문을 이어갔다.

"작가들의 표정이란 게 있나요?"



"그런 건 딱히 없죠. 작가라는 사람들이 뭐 특별한 게 있나요? 다 자기 마음이지. 그래도 저는 느끼는 게 있습니다."

"어떤 거죠?"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의 표정은 있습니다. 동료로 보이는 사람을 만났을 때 마음속으로 짓는 표정. 저는 저를 보고 당신이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남성은 펜을 돌리지 않고 만지작 거리며 당당하게 말했다.


"동료요?"

"굳이 다른 말로 엮을 이유는 없으니까요."

남성은 충분히 답했다고 생각했는지 시선을 다시 노트에 내리꽂고는 무언가 끄적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손님들이 여럿 나가기 시작했다. 투명히 보이는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스멀스멀 자리를 비웠다. 여기서 조금만 내려가면 계곡이랑 산책로가 있다고 그랬다.


"갑자기 자리가 엄청 많아졌군요. 저들이 우리보다 바쁜가 봅니다. 일어나 보겠습니다, 실례했습니다."

남성은 인사를 하고는 반대쪽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긋지긋함을 느끼는 카페 직원에게 빈 컵을 갔다 주고 자리에 앉아 테이블을 휴지로 대충 닦았다. 청년은 피로를 느끼고 다시 노트북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단 한 문장이었다.


저는 작가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2


다음 날, 청년은 카페 내부에서 두리번거렸다. 자리가 없었다. 어제랑 똑같은 이들인지, 어제랑 다른 사람들이지만 똑같은 이들인지, 어제랑 똑같이 테이블은 꽉 찼다. 다른 점은 딱 하나였다. 어제 본 남성이 손을 흔들며 청년에게 합석을 권했다. 청년은 내키진 않지만 묵례를 하며 남성에게 다가갔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쵸. 오늘도 어제처럼 조금만 있으면 자리가 날 테니까요."

남성은 오른손으로 펜을 쥔 채 빨대를 쥐고 커피를 마셨다. 잉크를 마시는 것처럼 보였다. 청년은 어차피 곧 자리가 나올 거니 이따가 옮겨서 노트북을 꺼내기로 했다. 멍하게 앉아있었다.


"그래서 무슨 글입니까? 이것도 인연인데."

남성은 뒤에 필요 없는 말은 생략하고 물어봤다.


"말씀 편하게 하십쇼. 저는 곧 스무 살입니다."

"음... 그래, 고맙네. 자네는 무슨 글을 쓰고 있나?"

남성은 받을 건 넙죽 받고 논점을 다시 잡았다. 청년은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냥 글입니다. 딱히 거창한 건 아닙니다."

"가볍지도 않은가 보군."

"그러는 선생님은 어떤 글을 쓰시는 겁니까?"

"뭘 선생님이야, 그냥 아저씨라고 하게."

아저씨는 이야기를 이었다.


"여러 가지 쓰지. 소설, 글, 비평. 쓸 수 있는 것들 중에 쓰고 싶은 건 다 써. 그래서 내 대답도 자네랑 똑같아. 그냥 글이지. 어떤 글로 결정 날 지 아직 정할 때가 아니거든."

"결정을 짓고 써야 하는 것 아닌가요?"

청년은 머리가 커진 이후로 단련한 엄숙함을 무기로 접근했다.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럼 자네는 그렇게 써서 잘 써지고 있나?"

"이번엔 좀 특별한 경우예요."

"무슨 경우이기에?"

청년은 이럴 때 무력함을 느꼈다. 조절이 되지 않을 때. 의도치 않은 일에 다가가면 그 일에 휘둘리게 되는 일. 결국 모험을 하는 이들은 모험이 되어 버린다.


"제가 이 글을 문학으로 써 버리면, 이 글을 쓰는 의미가 없어져 버립니다."

"그럼 비문학으로 쓰면 되지 않나."

"비문학이 될 수가 없는 글입니다."

"글은 결론이 아니야. 결론이 되는 거지. 자네 곧 스무 살이면 내년부터 성인이라는 건데, 계획이 어떻게 되나?"

"대학교 진학 예정입니다."

"혹시 국문과나 문예창작과 인가?"

"그래서 그렇습니다."

아저씨는 노트를 덮고, 딸깍하고 펜촉을 넣었다. 청년은 이미 열지 않은 자기 가방을 한 번 바라보고는 마저 이야기하기로 결심했다. 아저씨 말마따나, 인연이기 때문에. 스쳐갈 것이기 때문이다.


"저는 문학을 전공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 하지 않으면 되지. 부모들 특유의 삭막함과 궁합이 좋을 텐데."

"제 부모님 두 분은 작가입니다."

아저씨는 흥미를 느끼며 팔짱을 꼈다. 다시 노트와 펜을 일하게 하고 싶은 걸 참았다.


"아버지는 잘 나가는 추리 소설 작가, 어머니는 순문학으로 문학상을 여러 번 받았습니다."

"내가 들으면 알 정도인가?"

"그건 들어봐야 알죠. '가면으로 죽이기'랑 '햇빛이 없는 곳'입니다."

"어마어마하군, 자네가 그 영식이었나."

아저씨는 작가답게, 그리고 연장자답게 추론하기 시작했다.


"그늘이 두렵나?"

"아닙니다."

"부모님과 다른 사람이고 싶나?"

"그건 직업이랑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자네. 글을 배우고 싶지 않은 거야, 아니면 글을 쓰고 싶지 않은 거야?"

"후자입니다."

"그럼 안 쓰면 되잖나."

청년은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달갑지 않은 모험이 된 탓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은 제가 글을 쓰기를 바라십니다. "

"지금까지 잘 써 왔나 보군."

"그리고 두 분은 너무 저를 잘 아세요."

아저씨는 답을 냈다.


"젊은이 다운 진지함이라는 건가."

"없는 마찰을 만드는 게 아닙니다, 저는 설득해야 합니다."

"두 분이 자네를 막고 있나?"

"그게 아니어도 어쩔 수가 없어요. 아저씨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지만, 일단 그렇다 치고. 작가라는 족속들은 늘 그렇잖아요. 특유의 음흉함으로 상대 하나하나를 관조하는. 본인들의 호흡으로 상대의 숨통을 막죠. 게다가 자식의 처지란 겁니다."

아저씨는 실실 웃다가 정색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은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이만 실례할게요. 자리는 애저녁에 비었으니까요."

"그래, 고생하게. 덕분에 오늘은 잘 써지겠군."

"저는 반대입니다."

청년은 가방을 둘러메고는 구석자리로 향했다. 어느새 카페는 한적했고, 빈 잔들과 축축해진 테이블도 조용했다.



3


한적한 시간대, 청년은 오늘도 여백을 채우지 못했다. 청년은 고민에 빠졌다. 본인을 적극적으로 억압하지 않지만, 속으로 여러 판단을 내리는 두 작가에게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야기에 중독된 그들에게, 이야기와 멀어지고 싶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 어물쩍 넘어가는 결말은 사양이었다. 부모님의 납득이 청년의 강렬한 동기였다. 청년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지금 쓰려는 글을 뭐라고 칭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기나 편지를 쓸 수는 없었다. 작가에게 형편없는 원고를 보여줄 수는 없었고, 잘 쓰면 잘 쓰는 대로 그들의 다른 음흉함을 자극할 뿐이었다. 문학이 아니라면 청년은 철학자나 과학자가 되어야 했다. 글을 우롱하는 글. 과거에 어떤 이가 문학을 등한시했나. 그 정도로 강한 척 한 사람이 있었나.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던 청년 앞에 또 아저씨가 등장했다. 아저씨는 자리에 앉았고, 이번엔 그가 노트와 펜을 꺼내지 않았다.


"생각이 자꾸 나서 말이야."

"저는 오늘은 한적한 시간에 왔어요. 아저씨도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근데 혼자 있으려고 한가할 때 온 게 아니라서."

아저씨는 주변에 널려 있는 빈 테이블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자네가 글을 왜 쓰고 싶지 않은지 궁금하네."

"오늘은 아저씨 차례예요. 아저씨는 어떤 글을 썼죠? 말씀해 주세요. 들으면 아는지 보게."

청년은 슬슬 모험을 벗어나고 싶었다. 아저씨는 호쾌하게 웃었다.


"그야 당연히 모르지! 나는 글로 돈을 벌어본 적이 없으니까!"

청년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작가도 아니었잖아요."

"그냥 회사원이지. 왜 작가가 아니냐. 글을 쓰는데."

"..."

"설마 멍청한 생각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청년은 용기를 내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모험이 되려 했다.

"물론,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직업이 아니어도 분명 작가일 수 있죠.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돈을 받는 프로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과연 작가라는 어떤 사람이 제대로 된 글을 쓰냐가 문제죠. 진실된 글을 진실되게 쓰느냐. 이게 가장 진부하고 불가피한 쟁점이라는 거예요. 저는 그걸 포기했습니다."

"참 더럽게 젊구만."

"그런 시선 익숙해요."

"부모님들께 이 이야기를 해봤나?"

"이제 해야 합니다. 도망친 산속에서."

"그걸 왜 이제서야 하는 걸까."

"제 말을 좀 들어보시죠."

청년은 노트북을 덮었다.


"글은 작가의 삶을 나타냅니다."

"그래야지."

"그러니 아무리 글을 잘 쓰는 사람이어도, 진실된 삶을 살아야겠죠. 안 그러면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진실이 뭐라고 생각하나, 도대체."

아저씨는 도전적인 청년에게 전혀 손해 볼 거 없는 도전을 걸었다. 아저씨는 죄책감을 느낄 일이 전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저희 부모님은 진실이 아닙니다."

"왜지? 아버지는 장르 문학을 다뤘고, 어머니는 입상을 했다는 것 때문은 아니겠지?"

"그것들도 문제 삼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좀 결이 다릅니다. 말씀하신 내용들은 아버지의 경우 '길', 어머니의 경우 '결과'입니다. 사소한 것들이란 거죠. 삶의 일부분에 불과해요. 저는 삶 자체에 의문을 갖는 것입니다." 청년은 눈에 도는 생기를 막을 수 없었다.


"장르 문학을 하면서, 입상을 하게 되면 서 얻게 되는 삶의 모습들을 봐 왔습니다. 자식으로서 바로 옆에서 말이죠. 아버지를 헐뜯는 이들, 부러워하는 이들. 어머니를 부러워하는 이들, 인정하지 않는 이들. 그리고 그들과 접하면서 부모님들이 결정한 언행들. 저는 그걸 보면서 잘한 것과 잘하지 못 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당사자인 부모님들이 판단하신 것도 봤죠. 통쾌와 후회, 예상과 우연을 봤습니다. "

아저씨는 묵묵히 청년을 쳐다보며 이야기를 들었다.


"진실은 '얻는 것'입니다. 여러 단어로 표현할 수 있겠죠. 선택, 발견, 쟁취, 직면. 근데 진실을 얻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불순물로 만들어진 덩어리가 우리들의 삶입니다. 따라서 작가의 양분인 작가의 삶은 진실이 아니고, 작가의 작품도 전혀 진실이 아닙니다. 저는 진실이 되지 못합니다. "


아저씨는 입을 열었다.

"결국 진실이 뭔지 전혀 모른다는 소리잖나."

"그쵸. 얻어 본 적이 없고, 얻을 수도 없으니 알 길이 없고, 알 필요도 없죠."

"그럼 우리 삶을 진실 말고 뭐라고 불러야 하는데."

"그게 고통입니다. 우리가 언어를 벗 삼으면서 진실 대신 얻게 된 고통. 진실을 추억하며 대체되지 않을 것을 영원히 찾다가 못 찾고 끝나는 게 삶입니다."

"..."

"저는 작가가 꿈이었습니다. 부모님 같은, 나아가 부모님께 존경받을 만한 작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진실된 작가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버렸는데, 그래도 죽을 수는 없지 않나요? 삶을 뭐라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작가가 되지 않으면 그걸 찾지 않고 살아가도 괜찮은 거죠."

"자네가 지금까지 내게 뭘 설명했다고 생각하나?"

아저씨는 책임감을 가지고 물었다.


"자네는 삶과 예술의 무용함을 설명한 게 아니야. 삶과 예술을 설명한 거지. 너는 작가가 되지 못한다, 이게 살아가는 방법이다라는 설명을 한 게 아니라는 거지. 그냥 슬프지만 당연한 '사실'을 말한 거야. 그리고 그 사실이 살아간다는 것이고, 예술을 한다는 것이지."

"그게 뭐가 중요한가요. 제 내면을 바꾸면 뭐 하나요, 실질적인 제 살아가는 방식은 그걸 인정해도 달라지지 않지 않나요? 저는 위인들처럼 발버둥 칠 자신이 없어요. 최대한 온전하게 살아가고 싶다구요."

"용기가 필요해 보이는 군."

아저씨는 억양을 낮췄다.


"용기를 낼지 안 낼 지는 그 사람의 선택이에요. 최소한의 것만 쫓으려 합니다. 모험에 휘둘리는 건 피로한 일일 거예요. 마치 아저씨를 만나 이렇게 대화를 한 것처럼 말이죠. 추가적일 뿐입니다."

"아니, 너가 진정 살아남고 싶다면 용기를 내야 해. 내가 알려주마."

"그런 건 됐고, 이 글이나 어떻게 써야 할지 조언 좀 해줘 봐요."

"성공하지 못하면 넌 죽을 거야. 당장."

아저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에 박혀 있던 소화기를 끌고 오기 시작했다.



4


질질 끌려 온 소화기는 테이블 옆에 철퍼덕 쓰러졌다. 목을 졸렸다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청년은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예요!"

"앉아. 대화 안 끝났다."

아저씨는 나직이 말하고는 양손을 깍지껴 테이블에 올렸다. 청년은 침을 꼴깍 삼키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이제 이곳에 불이 날 거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렇게 상상을 해보는 거야."

아저씨는 입꼬리를 조금도 올리지 않고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정확히 어디에, 어느 크기로 불이 날지는 모르지. 그래도 난다고 생각해 봐. 그럼 이 소화기는 그렇게 소름 끼치는 물건이 아닌 거야."

"그런 상상을 왜 해야 하는 거죠?"

"요즘 날씨가 건조해서 산불이 자주 났잖아."

"그건 전혀 의미 없는 배경이잖아요."

"왜 없어. 너도 이 나라 살잖아. 지금 산속에 있고."

청년은 일단 듣고 있기로 했다. 부디 싱거운 모험이 되기를 바라면서.


"그럼 여기서, 이런 상상을 하는 놈이랑 그렇지 않은 놈이랑, 실제로 불이 났을 때 더 여러 가지 선택을 가진 쪽은 어느 쪽이겠니?"

"당연히 이러고 있는 놈이겠죠. 근데 불은 안 나잖아요."

"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불이 날 거라는 단서가 전혀 없잖아요."

"너가 그걸 어떻게 아냐니까."

청년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제가 그걸 어떻게 아나요."

"그게 진실이다."

"예?"

"제대로 알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는 게 진실이라고."

"알고 해내는 게 진실이죠. 그리고 전 포기했다니까요."

"니가 포기할 수 없는 걸 포기한 게 문제라는 거야. 불에 타 죽고 싶다는 소리라고. 우리가 살면서 갑작스러운 불을 얼마나 자주 만날 것 같나. 글쟁이든 아니든 누구든 만나. 너는 글이 아니라 삶을 포기한 거야. 그러면 제 명에 못 죽지. 그거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게 될 거다. 삶이 망가진다는 소리지."

"이제 그만하시죠."

청년은 진절머리가 나기 시작했고, 글이고 나발이고 오늘은 그냥 누워서 쉬고 싶어졌다.


"아저씨가 얼마나 외로운지는 잘 알았네요."

"그래. 난 외롭다. 그래도 외로워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덜 외로워. 너 같은 애들 보다는 훨씬 젊다는 거지."

"평안한 휴가 되십쇼."

청년은 가방끈을 한쪽 어깨에 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습관적으로 카페 내부를 쓱 훑었는데, 이질감이 들었다. 평소보다 어두웠다. 아니 새까맸다. 그리고 그 흑색은 일렁거렸다.

"화재입니다! 손님 여러분 주차장으로 대피해 주세요!"


양복을 입은 남성 한 명이 와서 크게 소리치고는 바쁘게 뛰어나갔다. 카페 직원도 커피머신을 닦던 행주를 입에 갖다 대며 뛰쳐나갔다. 다시 보니 테라스에 있는 테이블에서 불이 나기 시작했다. 더 안 쪽을 보니 인근 숲에 큰 불이 날뛰고 있었다. 청년은 믿을 수 없었다. 자기 모험의 절정이 믿을 수 없었다. 청년은 아저씨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불이 엄청 크게 났어요! 빨리 나가셔야 돼요."

"헤헤헤."

아저씨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청년을 쳐다봤다.

"뭐 하시는 거예요! 빨리 나가야 한다니까요."

"너한테는 그 선택지 하나밖에 없겠지."

청년은 붙잡아 당기던 아저씨의 오른팔을 놓았다.


"아까 왔다간 호텔리어도, 도망간 카페 직원도 똑같아. 그거밖에 없었지. 나는 다르다. 그리고 마음을 먹었어."

아저씨는 씨익 웃더니 소화기를 잡아 들고 테라스 쪽으로 향했다.

"어디 가요!"

청년의 절규를 뒤로 하고, 아저씨는 불이 붙은 테라스를 향해 소화기를 쐈다. 청년은 소화기를 사용하는 걸 처음 봤다. 이렇게 큰 소리가 나는지 몰랐다. 그 얇은 호스에서 그렇게 강렬하게 하얀 숨을 내뿜는지도 몰랐다. 청년은 멍하니 그 숨결을 지켜봤다. 아저씨는 테이블들을 다 혼내준 후 불이 난 산속으로 뛰어갔다.


"거긴 정말 위험해요!"

청년은 테라스를 나서지는 못했지만 있는 힘껏 소리쳤다. 올라오는 열기와 무너진 나뭇가지들 때문에 아저씨가 점점 시야에서 사라졌다. 청년은 혼란스러웠지만 카페 여기저기를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다른 소화기라도, 아직 남아있는 사람이라도, 자신을 도와줄 뭐라도 있기를 바라고 뛰어다녔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청년은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청년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시뻘건 소방관들이 도착했다. 소방관들은 상황을 살피고는 밖으로 나갔다. 청년은 그들을 따라갔다. 소방차가 호텔 옆길을 파고들어 아저씨가 들어간 숲 쪽으로 다가갔다. 차에서 내린 소방관들은 그들이 너무나 잘 아는 대로 행동했다. 각자 자리와 역할에 맡게 위치하고 물을 쏴대기 시작했다. 청년은 계속 시도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못했다. 불은 빠르게 사그라들기 시작했고, 아저씨가 큰 물줄기에 맞는 것을 봤다. 이를 발견한 소방관은 장비 일부를 멈추고 산속으로 달려가 아저씨를 부축해 데리고 왔다. 어느새 진화가 마무리됐다. 생각보다 큰 불이 아니었다.


청년은 콜록대는 아저씨에게 다가갔다. 아저씨는 상하의와 꽉 쥐고 있던 소화기까지 시커메져 있었다. 여전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도, 할 수 있는 말도 없다는 것을 느껴버렸다. 호텔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뛰어왔다. 아저씨와 소방관 셋이서 대화를 시작했다.


"선생님, 괜찮으십니까? 선생님 덕분에 불이 크게 번지지 않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호텔과 사람들을 지켰어요."

아저씨는 소방관이 건네준 생수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저 청년입니다."

갑자기 아저씨는 청년에게 손가락질을 했고, 소방관과 호텔장도 청년을 쳐다봤다. 청년은 혼이라도 나는 듯이 바짝 쫄아서 양다리가 경직됐다.


"저 청년 덕분에 소화기를 쓸 수 있었어요. 저 친구가 용기도 북돋아 주었습니다."

소방관과 호텔장은 쉽사리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아저씨의 카리스마에 충성했고, 청년에게 고개를 숙이며 다가가기 시작했다. 청년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도망가려 뒷걸음질 쳤다. 거리가 점점 멀어지자 아저씨가 뭐라 소리치는 건 보였는데 잘 들리지는 않았다. 청년은 그의 말을 듣지 않기로 결정하고 뒤돌아 걸어갔다. 이게 청년의 모험, 그 결말이었다.


청년은 아저씨가 했을 말들을 앞으로 천천히 상상해 보기로 했다. 가방에 들어있는 노트북을 양손으로 만졌다. 갓난아기를 업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청년은 또 상상했다. 저 아저씨는 분명 몸을 추스르고 바로 카페로 가 자기 노트를 챙길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