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 감정

열세 번째 이야기

by 향다월



다리랑 머리만 있는 놈이었다. 아니 다리랑 눈이라 불러야 하나. 아님 팔이랑 눈이라 불러야 하나. 놈은 두 다리를 아빠다리처럼 가로질러 포개놓고, 허리를 숙인 것처럼 조용히 앉아있었다. 아니 머리를 바닥으로 수그려 앉았나. 그럼 눈 혹은 머리라 부른 것을 등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등은 갈비뼈 안쪽에 갇혀 있는 허파처럼 좌우 양쪽으로 동일했다. 검은 단색 테두리의 안경이었다.


새벽 공기는 유달리 움직이지 않았다. 인적 없는 공원은 특히 움직일 수 없었다. 참을성 없는 공원 나무의 가지들이 바람의 환상을 잠깐 들이밀어줬다. 바람은 전혀 흐르지 않았고, 아주 살짝 오르락내리락하는 한기가 있음 직한 소리와 빛을 대신하고 있었다. 공원은 어느 각도에서도 한 번에 눈에 담기지 않았지만, 단 몇 보면 공원에서 새벽으로, 새벽에서 다시 공원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누군가 자리 잡고 있는 땅을 무시하기 가장 탁월한 크기였다. 그래야 시선은 마음을 담을 수 있다. 어느 사내도 이 공원의 완벽한 규모 덕분에 한 물건을 뚫어져라 응시할 수 있었다. 만약 공원이 조금만 더 작았다면 공원은 안경의 감옥이 되어 누구도 침범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공원이 조금만 더 컸다면 공원은 사내의 감옥이 되어 사내는 이내 탈옥했을 것이다.


사내는 벤치 가장자리에 앉아 왼쪽을 응시했다. 바로 옆 벤치 왼쪽 가장자리에, 누군가 놓고 간 안경이 수그려 앉아 있었다. 사내는 꺾고 있던 고개에 맞춰 몸을 돌렸다. 허리가 돌아가니 왼쪽 허벅지가 들렸다. 양발이 벤치 위로 올라갔다. 사내는 양팔을 무릎에 올리고 생각에 잠겼다.



저 안경을 쓰고 싶다.

내가 저 안경을 쓰면,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안경의 본 주인이 되는지, 제3의 누군가가 되는지는 관심 없고, 지금의 나는 사라질 것이다. 아니, 없애버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나를 지워버릴 수 있을 것이다. 시야는 단순히 시각이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관찰자의 세상을 투영하는 것이다. 렌즈의 영혼은 바깥에 있다. 그러니 저 안경은 그냥 양쪽 귀에 매달리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날려버리고 싶은 몸을 땅덩이에 내리꽂아주는 중력처럼, 누군가의 삶을 지속하는 주박이다. 가축들 귀를 뚫은 번호표다. 아니, 교수형 직전의 사형수가 감는 올가미다! 내 영혼이 나의 몸을 벗어나도 나와 연결되어 줄 동아줄일 것이다! 저 안경은 내 시야를 뒤집어줄 것이다. 나의 세상을 재정립해줄 것이다. 나의 영혼에 거역할 수 없는 쇠고랑을 채워줄 것이다.


주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이는? 직업은? 가족 관계는? 아니야. 이건 잘못됐어. 관심을 가져서는 안 돼. 기대를 해서는 안 돼. 그 주인이 나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는가 저울질해서는 안 돼. 내가 그보다 잘 살고 있을지도 몰라. 나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인간일지도 몰라. 모든 인간은 조금도 다를 바 없을지도 몰라. 나는 그 사실을 진심으로 믿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기에 쓰고 싶다. 다른 세상을 보고 싶다. 다른 세상에 가고 싶다.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 그 누구, 그 무엇이라도 좋으니 한 번이라도 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영영 나를 벗어났으면 좋겠다. 저건 문일지도 몰라. 완전히 다른 공간. 자물쇠가 없는 지금이 기회일 것이다. 저건 절벽일지도 몰라. 발을 내딛고 떨어져야 그 아래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내디뎌야 한다. 내질러야 한다! 이번이 분명 마지막이다. 저 안경을 내일부터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매일 공원을 들른다 해도 다른 안경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나의 끝이자 알 수 없는 시작이다. 내가 아닐 수 있다!



사내는 입을 오므렸다 벌렸다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몸을 굽혔다. 그러다 조금씩 왼쪽으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엉덩이만 조금씩 밀더니 이윽고 여러 번 일어났다 다시 앉으며 자기 딴에 오아시스를 향해 천천히 접근했다. 놈의 다리, 등이 본격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사내는 누워있는 안경을 바라봤다. 안경알을 지긋이 쳐다보며 곧 사라질 자신을 추모하고 있었다. 그러다 내려야 할 결정이 하나 떨어졌다. 안경알 아래쪽 세상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약간의 굴절도, 희석도 없었다.



이 안경, 도수가 없는 거 아니야? 아니,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인가. 그렇담 내가 그리던 새로운 무언가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가 되어 버릴 것이다. 저 안경은 안경일 뿐이다. 나는 조금도 바뀌지 못할 것이고, 그 무엇도 환기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죽을 수도 없고, 저 흉물은 나의 어떤 것도 부수지 못할 것이다. 평소처럼, 언제나처럼 새벽에 공원과 나만 존재할 것이다. 희망의 소멸로 다음을 기약했을 터인데, 절망보다 못한 세상에 갇혀버렸다.


아니지. 실제로 도수가 있냐 없냐는 중요하지 않지. 저 안경의 주인이 무슨 용도로 저걸 썼는지도 중요하지 않지. 무슨 저의로 나를 만나게 했는지는 하등 중요하지 않지. 내가 안경이 되면 된다. 내가 렌즈가 되면 된다. 내가 스스로 새로운 감옥이 되어 다시 벽과 대화하면 될 것이다. 이 새벽의 승자는 나다. 오늘 이겨야 한다. 내일 새벽도, 모레 새벽도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빨리 나를 투옥해야 전쟁이 끝날 것이다. 종전을 맞이해야 한다. 내 손으로 어떤 미래를 지킬 수는 없다. 저 안경을 밟아 부숴버리면 나는 영생하게 될 것이다! 저것과 벗 삼아야 한다. 저것이 되어야 한다.



사내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안경을 쥐어잡기 직전, 마지막 의문이 도착했다. 의문은 빠르게 해소되었다. 사내는 오른손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후 발걸음을 몇 번 떼었고, 다시 새벽으로 돌아갔다. 사내는 자신이 없었다. 자기 자신을 없애버리고 새로운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은 있었지만, 도수 없는 안경을 쓰고 어지러운 체할 자신은 없었다. 너무나 똑같은 풍경에 대고 낯설다 느낄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사내의 새벽은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