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이야기
1
울그락 불그락 크기를 겨루고 있는 능선들 사이 깊숙한 곳에 동굴이 하나 있었다. 아늑하다기엔 너무 크고, 바람소리도 앙칼지게 들리는 그 동굴에 큰 곰 한 마리가 자고 있었다. 등가죽에 움푹 파인 여러 흉터들과 절반정도 뜯긴 오른쪽 귀에서 풍기는 피내음은 이 동굴이 생기기도 전부터 진동한 것처럼 분명했다. 그래도 동굴에는 아기곰들의 코고는 소리 밖에 나지 않아 그 상처들은 금방 동굴의 어둠에 가려졌다. 풀이 갈라지는 소리에 큰 곰은 잠에서 깼다. 딱 토끼들 귀를 덮을 정도까지 자란 수풀이 길을 내자 호랑이 한 마리가 동굴에 도착했다.
"아저씨, 잘 지냈습니까?"
"자네 또 무슨 일인가."
"기가 막힌 이야기가 하나 있소."
이 호랑이는 근방 호랑이들 중에서 가장 덩치가 컸다. 예전에 곰이랑 시비가 붙었는데, 싸우다 서로 죽을 뻔한 이유로 그냥 동네 이웃으로 지내고 있다. 젊은 호랑이는 숨을 고르고는 곰 옆에 앉아 꼬리를 흔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저씨는 꿈이 있습니까?"
"꿈? 뭐, 갑자기 인간이라도 되고 싶은 게야? 마늘이랑 쑥만 먹다 죽은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무슨 헛바람이 분 게야?"
"인간이 되어서 무엇합니까. 그래도 인간들이 정말 멋진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피부 벗겨내는 게 멋있는 일인가?"
"제가 얼마 전에 알아낸 것인데 말입니다..."
호랑이는 몇 달 전에 있었던 등산객 이야기를 꺼냈다. 등산객은 산 정상 어느 바위에 기대어 무슨 책을 펼쳐 보고 있었는데, 호랑이는 그 뒤에서 엄청난 것을 봤다. 그 책에는 자기랑 비슷하지만 색깔은 흰 호랑이가 크게 포효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호랑이는 입이 쩍 벌어져 더 자세히 보고자 가까이 다가갔고, 등산객은 깜짝 놀라 줄행랑을 쳤다.
"흰 범이야 아주 가끔 보이긴 했지. 마지막으로 본 게 첫째 딸 태어날 때였던 것 같은데."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인간들 말을 주워 들었는데, 그게 '다큐멘터리'라고 한답니다."
"그게 뭔데?"
"인간들 여럿이 모여서 무슨 막대기나 판 같은 것을 들고 다니는데, 그들이 만드는 게 '다큐멘터리'이고, 그걸 종이책에 옮긴 게 아까 말한 것 같아요."
"그건 어디 있나?"
"수영하고 있을 때 웬 사슴이 먹어버렸습니다. 배를 갈라봤지만 소용없었어요."
호랑이는 얼굴에 노색을 띄면서 그 사슴의 뒷다리 맛을 상기하다 침을 흘렸다. 곰은 못다 즐긴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자네 꿈이 뭔데, 도대체!"
"저는 배우가 될 겁니다."
"배우? 배우는 또 뭘 하는 일인가."
"그 다큐멘터리의 주역입니다. 그 흰 범처럼요."
"인간들 득 되는 게 뭐 좋은 일이라고 꿈을 꾸나? 자네는 밥 먹일 손주들이 없어서 그렇게 태평한가?"
곰은 동굴 안쪽에서 웅얼대는 아기 곰들을 핥으며 말했다.
"누가 뭐래도 제 꿈은 그것입니다. 제가 그 흰 범보다 더 크고 싸움을 잘합니다."
"그럼 뭐 하나, 인간들이 우리말을 알아듣는 것도 아니고. 그랬으면 내 아들도 살아있었겠지."
"아저씨, 부탁이 하나 있어요."
호랑이는 눈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혹시 나중에 그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인간들을 발견하면, 저랑 같이 나오실래요?"
"뭐?"
"저희 덩치면 아무래도 인간들이 더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해서..."
곰은 두 발로 서서 크게 소리쳤다.
"젊은 놈이 맞먹어주니까 기어올라?!? 저번에 못 겨룬 승부나 마저 할까?"
호랑이는 화들짝 놀라 동굴을 빠져나갔다.
"약속을 지금 지키고 싶은 게야?"
"아, 알겠어요, 알겠어! 나중에 종이책으로 물고 오겠습니다! 겨울잠 자기 전에 보여주겠어요!"
호랑이는 수풀 속으로 사라졌고, 곰은 한숨을 푹 쉬고는 다시 누워 잠을 청했다.
2
곰 아저씨 동굴에서 쫓겨난 이후로 호랑이는 산 곳곳을 뒤졌다. 인간들이 올라올 수 있을 만큼 적당히 깊은 골짜기를 돌다 드디어 인간 무리를 발견했다. 7명 정도의 젊은 인간들은 멀찍이서 풀을 뜯는 사슴을 찍고 있었다. 개울에 숨어 상황을 살피던 호랑이의 눈이 번뜩였다. 얇은 엿상자처럼 생긴 검은 판이 그들의 장비라는 것을 호랑이는 배웠다. 겨우 사슴 따위에 제대로 된 장면이 나올 리 없지. 호랑이는 저 사슴을 습격하기로 했다. 단박에 목을 비틀어 주마!
호랑이는 천천히 개울을 헤엄쳐 사슴 쪽으로 다가갔다. 사슴을 습격하려는 찰나, 인간들이 휴대폰을 내리고 자기들끼리 잡담을 하기 시작했다. 이걸 직전에 본 호랑이는 돌을 잘못 밟아 철퍽 소리를 웅덩이에 머리를 박았다. 이에 사슴은 달아나기 시작했다. 호랑이는 인간들이 사슴을 향해 다시 휴대폰을 들기 시작하는 것을 발견했다. 쟤네는 마늘이랑 쑥을 그렇게 먹었는데 참을성이 저렇게 없어! 오히려 잘 됐다. 긴박한 그림이 그려졌어!
호랑이는 젖은 털을 거세게 흔들었다. 그러고는 크게 포효하며 사슴을 추격했다. 앞발에 박차를 가해 순식간에 사슴에게 다가가 목을 물었다. 호랑이는 버둥거리는 사슴을 땅에 꽂아 숨통을 끊고는 인간들을 바라봤다. 멀리서도 흥분한 인간들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인간들도 호랑이도 그저 기다렸다. 호랑이는 이래서는 그 흰 범처럼 크게 찍힐 수 없다고 생각했고, 물고 있던 사슴의 목을 놓고 천천히 인간들에게 다가갔다.
호랑이가 한눈에 내다보이는 산 정상이었다. 높이 솟은 나뭇가지 때문에 모여있는 인간들은 보이지 않는 그곳에 카메라를 들고 서 있는 다른 인간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큐멘터리 촬영 팀이었다.
3
방송국에서 나온 촬영 스텝들은 풍광을 찍기 바빴다. 그중 한 스텝이 사슴을 물어 죽이고는 천천히 움직이는 호랑이 한 마리를 찍고 있었다.
"야, 인서트 찍어야지 너 뭐 보고 있냐?"
그의 선배는 궁금증을 표하며 카메라가 겨냥하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이야, 엄청 큰 호랑이네. 근데 우리 시간 없어. 적당히 찍고 빨리 내려가야 돼."
"에이, 우리 감독님을 잘 모르시네, 그 사람 성격에 여기서 라면이라도 안 끓여 먹으면 내려갈 생각을 안 할 텐데, 우리 시간 많아요."
"하 씨... 슬슬 머리 아파서 빨리 내려가고 싶은데."
"저 호랑이 특이해요. 죽인 사슴을 그대로 내려놓고 다른 곳으로 가고 있어요. 다른 포식자랑 눈이라도 마주친 걸까요?"
"우리는 오늘 호랑이가 아니라 자연인 찍으러 왔잖아. 용량 아깝게 뭘 그런 걸 찍고 있어."
"딱 기다려 봐요."
호랑이가 서서히 다가오자 사슴을 찍던 인간들은 경직됐다.
"오빠, 저 호랑이 저희한테 오는데요?"
"에이, 괜찮겠지."
등산 동아리 대학생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는 호랑이를 향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형, 빨리 가야 할 것 같아요. 위험해요."
대학생들이 수군대자 호랑이는 쾌재를 부르며 여러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앞발을 들어 곰 아저씨를 흉내 내보기도 하고, 최대한 입을 크게 벌려서 날카로운 이빨을 자랑했고, 꼬리와 앞발을 마구 휘둘러 강한 모습을 어필했다.
"쟤 화난 것 같은데?"
대학생들은 호랑이의 열연에 두려움을 느꼈고, 빠르게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호랑이는 자신의 꿈이 멀어질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뭐야?? 어디가? 내가 부족한 거야?
호랑이는 대학생들의 시야가 닿는 산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주의를 끌기 시작했다. 괜히 멀쩡한 나무를 긁고, 물 웅덩이를 어지럽히고, 잘못 걸린 멧돼지도 제압했다. 산이 귀찮다는 듯이 울렸다. 급하게 움직인 호랑이는 몸 곳곳을 바위나 나무에 부딪혔고, 노란 초원 군데군데에 흐르는 검은 강물이 연상되는 멋들어진 무늬가 점차 검붉게 피에 물들었다. 호랑이는 다시 대학생들 쪽을 바라봤지만 그곳에 인간을 포함한 어느 동물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목이 잘린 사슴과 얼굴이 망가진 멧돼지, 상처투성이인 호랑이 한 마리만 존재했다.
그들을 찾아야 돼! 호랑이는 그 대학생들이 타고 갈 능선의 지름길을 따라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 비탈진 암벽을 오르다 발을 헛디뎠고, 호랑이는 그대로 추락했다. 호랑이는 떨어지며 튀어나온 바위에 여러 번 부딪혔고, 이내 붉은 피거품을 내며 절벽 끝에서 죽었다. 호랑이는 몇 번 안 남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아쉬움에 사무쳤다.
"쟤 뭐 하냐?"
옆에서 지켜보던 선배는 호랑이의 기행에 의문을 표했다.
"재밌는 영상이 나왔죠?"
후배는 어깨를 으쓱하며 카메라를 내렸고, 바로 옆에 촬영 감독이 서있었다.
"줘 봐."
후배는 아까운 것을 놓쳤다는 마음으로 순순히 감독에게 카메라를 건네줬다.
4
"우리는 진짜 다큐멘터리를 잃었어요."
"우리가 아니라 너겠지."
두 촬영 스텝은 위 쪽이 평평한 바위 하나를 테이블 삼아 컵라면을 앉혀놓고 이야기했다.
"진짜 다큐멘터리는 그 어떤 개입도 없는,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이어야 해요. 그래서 사람을 찍는 다큐멘터리는 진짜가 아니에요. 대상이 말을 하고 있잖아요. 그 말을 어떻게 믿죠? 누가 시켰을 줄 알고? 그가 어떤 의도를 품었을 줄 알고? 저희가 지금 찍고 있는 자연인이 자연인일까요? 그냥 흔해빠진 사회 부적응자 아니에요?"
"나는 그 자연인 덕분에 우리가 월급 받는 있다는 게 제일 진실이라고 본다. "
"그래서 동물이야말로 유일한 다큐멘터리의 모델이에요. 그들은 우리처럼 복잡하고 더러운 생각을 하지 않죠. 그냥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에요. 그러다 죽는 거고. 이것만큼 진실이 어디 있죠? 저희는 영화 찍는 사람이 아니에요. 영화 찍고 싶은데 능력 없어서 못 찍는 사람 취급받을 거예요?"
"야, 들어봐."
선배는 쪼갠 나무젓가락으로 덜 익은 면발들을 휘저으며 말했다.
"우리가 찍는 영상들이 걔네들의 모든 모습이 아니잖아. 니가 아까 찍은 조울증 걸린 호랑이처럼, 걔가 언제부터 그런 짓을 했는데? 원래 그런 놈이었어? 아닐걸. 동물은 우리보다 똑똑하니까 허튼짓 안 해. 근데 우린 그걸 왜 모르냐 이 말이야. 그리고 넌 왜 찍었어? 우리가 진실을 담는 사람들이면, 왜 그 호랑이를 이해를 못 하냐고. 오히려 몇 시간이고 인터뷰할 수 있는 산에 사는 노인네가 더 진실되게 담을 수 있는 거 아니야? 우리는 영화 찍는 사람이 아니듯이 기사 쓰는 사람들도 아니잖냐. 결국 다 똑같이 어쩔 수 없는 거야. 본 것만 본 게 보고 싶은 대로 본 거랑 똑같다고."
"..."
"내 말 듣고 있냐?"
후배는 먹던 라면을 내려놓고 일어서 산골짜기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선배도 자리에서 일어서 그쪽을 바라봤다. 죽어있던 호랑이 곁으로 큰 곰 한 마리랑 아기 곰 몇 마리가 모여들어 있었다.
"역시 그 영상은 지우면 안 됐는데."
후배는 아쉬운 마음에 카메라를 들지 못했다.
5
늙은 곰은 손주들을 데리고 나물을 먹이다가 호랑이 시체를 발견했다.
"쯧... 진짜 약속을 지키면 어떻게 하냐. 못난 놈아."
호랑이와 곰은 예전에 싸우다 이런 약속을 했다. 둘은 훗날 한쪽이 죽으면 남아 있는 쪽이 잡아먹기로 했다. 호랑이가 죽으면 손주들에게 먹이고, 곰이 죽으면 주검을 없애 아이들이 동굴을 나가 혼자 살아갈 수 있게 말이다. 곰은 손주들에게 호랑이를 찢어 주며 먹였다.
후배는 뒷정리를 하며 그 장면을 지켜보다 일행들과 산을 내려갔다. 점점 멀어지자 후배의 눈에는 피에 묻은 호피 무늬는커녕 그 안쪽에 검붉은 살덩이조차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