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페티예에서
단단히 매어 온 긴장의 끈이 툭 끌러지며 한참을 울었다. 여행을 위해 내가 지불하는 것들의 목록에 돈과 시간과 체력 외에 약간의 눈물도 넣었어야 했다. 찾아내고 가져가는 값진 것들이 훨씬 많지만 감정이라는 것은 원체 상쇄와 계산이 가능한 영역 밖에 있으므로, 이 또한 긴 여행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머나먼 이국 땅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나는 혼자가 되었고, 누구도 나를 위해 달려와 줄 수 없으며 모든 걸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함을 온몸으로 느꼈다. 가는 곳마다 새롭고 아름답지만 동시에 상상할 수 있는 위험과 상상할 수 없는 위협들로 몸과 마음이 얼었다 녹기를 반복했다. 보호받고 싶다는 생각, 자기 보호에 대한 감각이 이렇게 날카롭게 증폭된 적이 있던가. 처음 겪고 느끼는 것들 앞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당황하게 되는 순간들이 자주 찾아온다.
나는 나를 달래는 일이 여전히 어렵다. 자기 자신을 달랜다는 건 자기 돌봄보다 한 차원 위의 문제인 것 같다. 어쩌면 달램 자체가 나에게 중요한 타인의 터치를 전제하고 있어서 혼자 힘으로는 안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빠 어디가>라는 옛 프로그램에서 어린 윤후가 처음 자전거를 배우다 넘어지는 장면을 나왔는데, 그 때 아들을 달래는 윤민수 씨의 첫 마디는 이랬다. “괜찮아 괜찮아, 아빠가 봤어.“ 윤후는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이내 정말로 괜찮아졌다. 이 장면이, 특히나 저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아빠가 봤단다. 그게 뭐 어떻길래, 아이를 달래고도 남는 힘이 실리는 것인가.
달랜다는 표현은 어른이 아이를 진정시킬 때 많이 쓰인다. 이 때 어른의 자리에는 아이가 믿고 의지하는 존재가 위치한다. 그리고 그 조그만 생명체를 지키고자 하는 보호자만이, 조급하지 않은 마음으로 아이를 달랠 수 있다. 방치나 윽박지름 대신 달래기를 택하는 이유는 피보호자가 가진 취약함과 연약함을 잘 알고 있으며 그 약함에 늘 마음을 쓰기 때문이다. 보호하기 위해 눈을 떼지 않는 것, 찰나의 휘청임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는 것. ‘아빠가 봤어’의 진짜 의미는 여기에 있다.
달래는 말은 현실적이거나 정직할 필요가 없다. 이때만큼은 내용의 진위 여부보다 듣는 상대를 안심시키고 안정시키는 말의 역할이 더 중요해진다. 달래는 말은 무질서하고, 논리정연하지 않으며,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사랑과 몹시 닮은 모양새이다) 그럼에도 그 말과 행동이 헛되거나 공허하지 않은 이유는, 울고 있는 사람과 그가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리는 사람을 이어주기 때문이다. 달래는 말은, 더 정확히는 달래는 존재 자체는 우는 사람의 흔들리는 세계로 들어가 그곳의 질서와 논리와 현실성을 지켜낸다.
제법 세상살이에 익숙해지고 무뎌진 사람들은, 어린아이만큼 경기를 일으킬 일이 자주 있지 않다. 그러나 여행은 나를 처음 만나는 세상으로 던지는 일이었고 이곳에서 나는 다시 어린아이가 된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미숙하고 어리버리하면서도 작은 일에 화들짝 놀라는 하루하루를 살다 보면 어른이 되어서도 달래줄 사람이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달래는 일은 관계의 구도와 위계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가 서로에게 믿을 수 있는 존재이자 지키고 싶은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그리하여 각자의 세계가 달래는 말로 연결될 때 우리는 어른이 되어볼 수도 아이가 되어볼 수도 있다. 대가없이 주어지는 것은 없음을 서서히 체감할수록, 무조건적으로 나의 편을 들어주는 말 한마디의 힘은 커진다.
당신의 세계를 함께 붙들 수 있다면, 나는 현실의 논리에서 이탈한 언어로 몇 번이라도 터무니없는 지지를 보내겠다. 내가 휘청일 때는 반대로 그런 터무니없음을 숨죽여 기다리고 싶다. 말이 되지 않는 말들의 정합성보다 나의 편이 되어줄 당신 존재의 정확성을 믿는다.
사랑을 담아,
튀르키예 페티예에서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