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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 May 13. 2024

다정을 연습하는 당신에게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라는 책이 있다. 진화인류학 수업을 해주신 교수님께서 감수를 맡으셔서 감수사 먼저 들춰보았는데, 내용은 그리 다정하지 않다. 제목의 번역이 신의 한 수였다고 한다. 당장 선물하고 싶어지는, 다정함을 끄집어내게 만드는 제목이지 않은가. 저자는 다정함을 일련의 의도적 혹은 비의도적 협력, 또는 타인에 대한 긍정적인 행동으로 정의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다정은 상대의 마음을 읽는 것에서부터 친밀감을 표현하는 일, 목표의 성취를 위해 힘을 모으는 일까지를 두루 아우르는 ‘능력’에 가깝다.


여행을 하다보면 거절을 당하기도, 차별을 당하기도 한다.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냉담함은 곧 다정함의 결여이기도 하다. 인간은 혈족과 친족에게, 같은 언어와 문화와 삶의 터전을 공유하는 집단 구성원에게, 비슷한 정체성을 공유하는 사람에게 다정을 발휘한다. 완벽한 타인에게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은 거의 없거나 아주 좁다.


그럼에도 다정한 시선으로 가득 찬 여행에세이가 있다면 미화라는 놀라운 후보정을 거쳤을 가능성이 높다. 낯선 언어의 웅성임을 들으며 잠에서 깨는 일, 지도를 보며 길을 찾아다니는 일, 버스타는 법을 몰라 한껏 눈치를 보며 앞 사람을 따라하는 일, 처음 보는 상대에게서 얻을 수 있는 호의를 가늠하며 무언가를 부탁하는 일은 모두 에너지를 확실하게 소모시킨다. 피로와 피곤은 몸을 움직이는 것뿐만 아니라 긴장감으로부터 오기도 하는데, 여행에는 그 모든 요소가 한데 섞여 있다. 그런 와중에는 나 역시 다른 누군가에게 다정해지기가 쉽지 않다.




다정함은 호명되는 속성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스스로를 두고 다정한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이를 보지 못했다. 당신이 나더러 다정하다고 말해줄 때에야 잠시 나는 다정한 사람이 되어볼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단어는 광범위한 의미의 수식어로 적절하지 않다. 일대일의 관계 안에서 내밀하고 세심하게 포착되는 순간으로부터 다정은 제 이름을 얻을 수 있다. 눈길과 목소리와 손짓과 끄덕임에 서려 있는 다정함을 보아 줄 수 있는 시선을 당신에게서 배웠다.


어떤 단어는 너무 많이 쓰이는 바람에 제 의미를 잃어가기도 한다. 다정함 역시 그런 단어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무해하고 안전하고 보드라운 것들에 대한 애정이 넘쳐나는 가운데, 다정하다는 말은 유행처럼 불어났다. 가끔 그렇게 쓰인 표현에 마음이 불편해지는 이유는 말 안에 담긴 힘이 사라지고 듣기 좋은 어감만 남았기 때문이 아닐까. 마치 다정함은 절대 해로울 수 없고 언제나 구하는 만큼 넉넉히 주어지는 듯이 남발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인간이 인간에게 정답게 구는 일이 하도 어려워 동물과 식물, 심지어 무생물을 향해 더 편안하게 다정한 시선을 던질 수 있던 것은 아닌지 자문하게 된다. 다정의 미망은 생의 고단함 앞에서 허무할 만큼 빠르게 스러진다.




평론가 신형철은 <느낌의 공동체>에서 어느 시인을 두고 “삶의 어느 법정에서건 나는 그녀를 위해 증언할 것이다“라는 문장을 남겼다. 근래에 읽은 말들 중에 가장 깊은 다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얕은 친절이 아니라 짙은 애정, 기꺼이 당신을 위해 나서겠다는 감수의 마음까지 더해진 다정함은 드러내야 아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꼭 필요한 때까지 감추어져 있는 종류의 것이다. 증명해야 할 마음이 아니라 증언하는 마음이다.


나는 우리가 연습하는 다정의 능력이 거기까지 나아갔으면 좋겠다. 미지근한 느낌만 남기지 않고 삶의 굽이에서 흔적을 남기는 온정을 건넬 수 있게 되면 좋겠다. 더이상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하겠다고 느껴질 때 당신은 다정한 사람이라고, 가장 먼저 당신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랑을 담아,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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