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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 May 28. 2024

편지를 좋아하는 당신에게

튀르키예 카쉬에서


여행을 떠난 지 한 달이 넘어간다. 지난 며칠간 몸도 마음도 별로 힘이 없어 펜을 놓았더니, 그새 글씨체가 흐트러졌다. 반듯한 글씨는 겉과 속도 어느 정도 단정한 모양새를 갖추었을 때 나올 수 있나보다.


내가 처음 알게 된 글씨체는 엄마의 것이다. 다섯살 무렵 들어간 유치원에선 ‘언어전달’이라는 숙제를 내 주었는데,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문장을 집에가서 전달하고 노란 수첩에 적어 와야 했다. 글자를 쓸 줄 모르던 나이에는 엄마가 그 문장을 대신 써주셨으므로 나의 노란 수첩에는 날마다 엄마의 손글씨가 쌓여 갔다.


누군가의 손글씨를 알아볼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건 엄청나게 특별한 일이다. 당신의 글씨체를 안다는 것은 당신이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의 표정이나 수화기 너머 들리는 당신의 목소리를 아는 것과 맞먹는 의미를 지닌다. 손글씨의 물리적이고 실제적인 형태에는 다른 이가 흉내낼 수 없는 고유함이 담겨 있다.




당신은 언젠가 편지를 잘 쓰는 사람이고 싶다고 말했다. 나도 그렇다. 편지라 함은, 쉽게 쓰려면 5분 안에 써낼 수 있지만 공들여 쓰려고 하면 몇날몇일을 붙들고 있어도 운을 떼지 못하는 류의 글이다. 여타의 글과 편지의 가장 큰 차이는 아마 수신인을 특정한다는 점일 터이다. 편지를 잘 쓰는 사람은 유려한 문장력을 갖춘 이가 아니라, 쓰는 내내 받는 이를 떠올리는 사람이다. ‘하고 싶은 말’을 쓰는 글과 ‘들려주고 싶은 말’을 쓰는 글 사이에는 수신인에 대한 애정만큼의 격차가 생긴다.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이 당신에게로부터 왔고, 그래서 진심이 될 수 있었다. 말보다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이 진짜 마음이라면 편지쓰기는 말을 행동으로 옮기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흘러가고 전달되는 움직임 안에는 생명력이 담기므로, 편지는 어떤 글보다도 살아 있는 형식의 기록이다.


작가가 독자를 상상하는 마음은 편지의 발신인이 수신인을 떠올리는 마음과 얼마간 닮아 있을 것이라고, 감히 추측해본다. 읽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나의 바람은 읽힌다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지에 대한 질문을 연이어 달고 왔다.


나에게 글쓰기는 일종의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누군가가 들어오기에 안전하고 튼튼한, 편히 자리잡고 생각에 잠길 수 있는 공간을 단어와 문장으로 짓는 일이다. 만일 그 글이 편지라면, 쓰는 이가 짓는 공간은 한 사람을 위해 세심하게 설계된 곳이리라. 수차례 다듬도 깎은 말들은 지치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한 명의 방문자를 기다린다.


이 편지 역시 당신에게 쉬어갈 틈이자 숨 쉴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쓰이고 있다.




이장욱의  <호명>이라는 시 일부를 인용하며 글을 닫는다. 언젠가 쓴 것처럼, 여기에 남기는 편지가 당신을 향한 정확하고 부드러운 호명이 되기를 바란다. 부르는 것과 돌아보는 것 사이의 멀찍한 거리에 이 문장들이 길이 되고 이정표가 되면 좋겠다.


생후 아주 오랜 시간을 지나 그대가

이제야 겨우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

나는 가장 건조한 음색으로 그대를 부를 것이다

누군가 그대를 불렀다고 생각하여

그대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순간,

단 하나의 이미지로 정화되는 생

나의 사랑은 그런 것이다



사랑을 담아,

튀르키예 카쉬에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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