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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원사계 Nov 01. 2023

1평짜리 방에 대한 이야기.

그렇게 도망치고 싶었던 곳.

2002년은 월드컵 때문이라도 잊을 수 없는 해이다. 월드컵뿐만이 아니라 12년 인생에서 처음으로 내 방이라는 소중한 공간을 얻은 해이기도 하다. 그전까지 우리 자매는 사생활이랄 게 없는 방에서 수도 없이 싸움박질을 하는 유년기를 지나고 있었다. 이사 간 집은 단독주택 2층짜리 건물이었다. 1층은 주인 세대가 거주하고 있다. 이 집에 온 이후 우리는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늘었다. 쿵쿵거리면 안 된다, 집주인아저씨를 불편하게 하면 안 된다, 크게 웃지 말아라 등등 엄청난 제지 들이 이어졌다. 내 집이 아니기에, 우리는 얹혀사는 입장이기에, 언제든 쫓겨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있어야 함을 체득했다. 1층 세대 옆으로 난 작은 쪽문으로 들어가면 우리 집이다. 어릴 적부터 우리 집의 작은 대문이 그렇게나 창피했다. 남들처럼 아파트에 살면 좋을 텐데, 대문이 필요 없으니까. 멋없는 쪽문은 자존심이 상하니 친구들을 데리고 오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 안에서도 우리 동네는 변두리로 유명하다. 20년이 흐른 지금도 지역 사회에 포함되어 있는지 모르는 이들이 왕왕 있기도 하다. 어딜 가서 내가 사는 동네를 이야기하는 것은 항상 움치러드는 일이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항상 나의 목표는 독립이었다. 최소한 남들에게 말했을 때 ’ 거기도 우리 지역이야 야?‘라는 말은 듣지 않는 곳으로, 작은 대문을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정확히는 독립이 아닌 도망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 같다.


20대 중반의 어느 순간부터 독립을 하게 되었다. 서울로 가서 일자리를 구했다. 내게 있어 서울은 도망치고 싶은 자들의 성지 느낌이었다. 상경을 꿈꾸는 지방인들끼리 약속이나 한 듯 거기엔 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초반엔 돈이 부족해서 작은 고시원에서 먹고 자고를 했다. 1평짜리 내 방보다도 작은 고시원은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집들이 실제로 존재하는구나 와닿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갈망하던 집으로부터의 도망이었기에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후에는 꽤나 넓은 원룸으로 이사를 했다. 시켜 먹는 음식이 대부분이었고, 나름대로 혼자 사는 삶을 만끽하고 그런대로 재밌게 살았다. 그러나 서울살이는 녹록지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서울 사람들은 나에게만 냉랭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야무지게 서울에서 자리를 잡겠다 생각했던 나는 금세 주눅이 들게 되었다. 후에는 꽤나 넓은 원룸으로 이사를 했다. 시켜 먹는 음식은 점점 물려가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집 생각이 이따금씩 나곤 했다.


문제는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면서부터였다. 서울 직장에서 퇴사를 하고 다시 취업준비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모아둔 돈은 떨어져 갔다. 고향에 와서도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버틴다는 마인드였다. 그래도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라며 되냈다. 오래가지는 못했다. 결국은 제 풀에 꺾일 수밖에 없었다. 떨어져 가는 쌀통 앞에서 어찌 고집을 부릴 수 있겠냔 말이다. 월세며 공과금이며 감당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작은 쪽문의 집이었지만 눈앞에 처한 내 상황이 암담했다. 다시 돌아간 집은 달콤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배달 음식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엄마의 밥이 있었고, 오랜 기간 살았던 집이라 그런지 모든 게 익숙했다. 눈을 감고도 내 방으로 찾아갈 수 있는 정도였다.


20년이나 지난 지금 여전히 나는 작은 쪽문의 집에 살고 있고 아랫집에 사람이 있을 시간엔 숨죽이고 지내야 한다. 그토록 도망가고 싶었던 곳에 내 발로 기어 오던 기분은 꽤나 묘했다. 창피하던 그 집은 우두커니 나를 반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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