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의 시작
몇 년 전 만났던 남자애가 같이 맞춘 케이스를 아무렇지 않게 쓰레기통에 버렸다. 몇 달간 쓰다 보니 깨진 곳이 많아져 나도 그 애도 지하상가에서 다른 걸 새로 산 직후였다. 화가 났다. “너 내가 선물로 준 걸 그렇게 쉽게 버릴 수가 있냐”. 우리 추억이 담긴 똑같은 케이스인데, 그 애는 곧바로 사과하고 쓰레기통에서 그걸 다시 주워서 다 깨져서 이젠 못 쓰니까 생각 없이 그냥 버린 거라며 절절맸다. 미안하다고 한참 달래주고서야, 겨우 기분이 풀렸다.
맥시멀리스트. 추억을 먹고 사는 사람. 내가 나를 부를 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는 말 중 하나다. 방 구석구석 할머니가 마을 길가에서 주워준 도토리, 헤어진 사람이 선물해준 더는 끼지 않는 끊어진 팔찌, 바다가 있는 도시에 여행 가서 주워온 돌멩이 같은 잡다한 거로 가득 차 있다. 가끔 시간 들여 하나씩 보다 보면 이 쓰레기들을 어쩌지, 나 너무 많은 걸 안고 살아간다 싶다가도 이 추억 덕에 내가 살지, 그러고 말았다.
그러다 지난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갑작스레 돌아가신 것도 있고 내가 할머니에게 갖고 있던 유대감이 컸던지라 상실과 후회가 꽤 오래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어떤 시련이 오든 나는 바닥에 닿으면 더욱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는다. 당신이 남기고 큰 유산 중 하나는 후회하지 않을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 그리고 너무 많은 욕심을 안고 살지 말자는 내 안의 다짐이었다.
곧바로 해볼 수 있었던 건 멕시코 여행의 비움이었다. 적어도 쓸데없는 기념품은 사지 말자고 생각했다. 늘 버리지 못하던 영수증도 모으지 말고 티켓도 정말 중요한 것만 갖고 있자고. 사야 할 땐 나름의 기준을 세워 샀다. 돌아오는 여행용 가방에는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줄 선물들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도시마다 모으던 엽서는 잘 써서 부치는 거로 만족을 대신했다. 나를 위해 고른 건 각양각색 거북이 모형들과 무용하지만 아름다운 푸른색 돌 열쇠고리와 잠깐 집을 구해 살 때 필요해 산 컵이 전부였다. 아, 쿠바와 멕시코 국기가 그려진 배지도 하나씩 샀다. 어느 도시를 가든 한 보따리씩 기념품을 챙기던 이전의 나에 비하면 대단한 성과라고 해두고 싶다. 마음의 욕심을 비우지는 못했지만, 물건에 대한 욕심은 어느 정도 실천한 셈이니까 말이다.
두어 달 비웠던 본가의 내 방에 돌아와 보니 내가 없는 새 엄마는 소소한 걸 치워뒀다. 나 없을 때가 기회다 싶어 버린 거다. 이제껏 방 구조나 물건 위치가 조금만 바뀌어도 나는 성질을 먼저 냈던 터라 그걸 겪어왔던 엄마가 많은 걸 버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저분하고 질서 없는 방이라도 어떤 물건이 어느 위치에서 제 역할을 하는지 아는 나로서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엄마, 꽃 버렸어? 물었다. 그늘에 한 줄기씩 정성스레 잘 말린 주황색 꽃이었는데. 먼지가 많이 쌓여 버렸다며 태연하게 말하는 엄마에게, 이전만큼 화가 나지 않았다. 책장에 모셔둔 선물 받은 인형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는데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나중에 보니 우리 집 강아지 사랑이가 물고 뜯으며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났을까. 동생 방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책장에서 제목에 ‘미니멀리즘’이 들어간 책을 한 권 찾았다. 관심도 두지 않았던 책이었다. 나는 맥시멀리스트니까. 무엇에 홀린 듯 열어 읽은 책의 한 부분이 자극적이었다. 물건은 다 마음의 욕심이고, 물질적인 걸 정리하면 정신적인 것도 정리할 수 있다고. 또, 정신적인 것까지 정리하는 게 미니멀리즘의 완성이라는 그런 얘기였다. 나는 물건에 있어서만 맥시멀리스트가 아니다. 늘 잡념이 많고 생각이 많고 관계가 복잡하고 과거에 묶여있을 때가 많다. 아무튼 간 정신도 이런저런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이다. 정신을 비우고 싶다는 생각이 물건을 본격적으로 버리게 만들기 시작했다.
책을 덮고 내 방으로 돌아와 당장 눈에 보이는 것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무용하면서 아름답지도 않은데 추억에 묶여 방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던지... 독일에서 받았던 은색 눈송이 크리스마스 장식이나 다신 보지 않을, 유럽과 독도에서 받았던 팸플릿과 티켓과 명찰 같은 걸 차례로 버렸다. 수능 끝나고 언젠가 다시 공부하겠지 싶었던 영어 단어장도 미련 없이 버렸다. 정리하고 버리는데 약간의 희열이 밀려왔다. 아쉬움과 미련보다는 속이 시원한 거다. 정신까지 맑아지는 데는 한참이 걸리겠지만, 좋은 시작이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