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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월 Jan 15. 2021

9. 너무나도 가벼운 익숙함의 무게

노련함 뒤에 숨어 있는 무심함

 몇 년 전 외할머니께서 고관절 치환수술을 받으셨는데, 수술 후 전신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져 중환자실 신세를 꽤 오래 지게 되셨다. 수술하고 얼마 안 되어 나는 엄마와 함께 중환자실 면회 시간에 맞춰 할머니를 찾아갔다. 담당 의료진에게 먼저 주의사항을 듣고, 각종 보호장구를 착용하고 나서 매 사람마다 커다란 기계들이 달려있는 공간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할머니는 커다란 기계로 둘러진 가장 안쪽 자리에 있었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주사를 비롯해 각종 튜브가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당시 경력 간호사였던 나는 그것들의 용도와 쓰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상황이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엄마는 달랐다.


같은 상황에서 서로 다른 마음의 무게

 엄마는 중환자실이라는 그 환경에 압도당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중환자실 실습을 처음 하던 때를 떠올렸다. 나 역시 처음 이런 광경을 봤을 때 놀라고 당황했었지, 하는 생각을 하며 엄마가 적응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곧 할머니가 우리 둘을 발견했다. 침상에 누운 채로 우리를 보고 반응하는데, 평소와는 달랐다. 나는 즉시 알아차렸다. 섬망이었다.

 할머니는 면회 시간이 끝날 때까지 우리를 알아보지 못했다. 엄마가 본인의 딸이고, 내가 그녀의 손녀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익숙하게, 평소와는 다른 할머니와 눈을 맞추고 대화했다. 엄마는 별 말이 없었다. 심각하게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런 엄마를 알아차리고 섬망의 증상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아주 평이한 어조로 말이다. 대부분 일시적인 현상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엄마는 곧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표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엄마, 어떻게 나를 못 알아봐."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속에서 엄마와 내가 느끼는 상황의 무게는 너무도 달랐던 것이다.


익숙함 그리고 무뎌짐

 노인이 전신마취를 통한 수술을 받고 나서, 착각, 망상, 기억력 장애와 같은 증상이 나타나면 대개 '섬망'이다. 아주 흔하다. 특히 고령일수록 그렇다. 대부분 일시적이다. 다만 그 증상이 시간이나 장소, 사람을 구별하지 못하고 환청을 듣거나 헛소리를 하는 것이므로, 처음 접한 보호자들이 많은 충격을 받곤 한다. 하지만 의료인이었던 나는 그게 익숙했고, 할머니의 변화마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내게 큰 감정의 동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엄마도 나와 같을 거라고 무의식 중에 혼자 결론 내렸다. 익숙함의 반복은 사람을 이만큼 무디고 둔감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깃털처럼 가벼운 말의 무게

 내가 외과 병동에서 일할 당시, 한 고령의 환자가 수술을 위해 입원했다. 입원 당일 그는 70대라는 연세에 비해 매우 정정했고, 신사다웠으며, 가족들과도 화목해 보였다. 그러던 그가 수술 후 180도 변했다. 가족을 못 알아봤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으며, 당장 나가야 한다며 밤중에 벌떡 일어나 혼자 침대를 빠져나가려다 크게 다칠 뻔하기도 했다. 나는 3일 내내 밤동안 그를 지켜봤는데,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영양제를 투여 중인 정맥주사를 툭하면 뽑아버리고, 소변줄을 잡아당겨 혈뇨가 (일시적으로) 나오기도 했으며, 수술 부위 드레싱을 마음대로 제거하려 들기도 했다. 이 모든 일들이 2~3일간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3일째 되는 날 밤, 혼자 나가겠다고 소리치는 환자를 겨우 다독여 재우고 나서 아들이었던 보호자가 병실 밖으로 나와 문 앞에 주저앉았다. 나는 그가 많이 지쳤겠거니 싶었다. 첫날 증세가 시작될 때 이런 증상은 1~2주 내에 사라질 거라고 미리 일러두었지만, 나는 다시 한번 말했다. 곧 이런 증상은 사라질 거예요. 그는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나중에서야 알았다. 섬망 환자를 바라보는 가족에게 1~2주라는 시간은 매우 길다.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는 사람에게 곧 끝날 거라고 의미 없는 메아리를 선사했던 것이다. 공감이 부족한 상태에서 하는 말은 깃털만큼이나 가볍다. 가볍게 태어난 말은 그렇게 한 톨의 의미조차 갖지 못하고 빠르게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노련함 뒤에 숨어 있는 무심함

 나는 어디 가서 무심하다거나 공감능력이 떨어진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암 수술하는 환자를 매일 같이 12~20명씩 보다 보면, 가끔 암 수술이 마치 별 거 아닌, '일상적'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암 수술이란, 한 사람의 인생 그래프에 큰 변곡점을 찍을 만큼 커다란 사건이다. 우리는 익숙함에 가려져 그 중대한 사실을 종종 까먹어버린다. 

 경력이 탄탄하고 의료 지식을 이론적으로 꿰뚫고 있다면 환자의 상태를 금방 '체감'하고 익숙하게 필요한 대응을 즉시 수행할 수 있다. 그것이 흔히 말하는 노련함이다. 이것은 때로 무심함이라는 독이 된다. 섬망, 그거 별 거 아닙니다. 금방 지나갈 거예요.라는 말은 진짜로 별 거 아니다. 환자와 보호자에게 길게만 느껴지는 시간을 혼자 알아서 버티라는 말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위로는커녕,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로써 재차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걸 한참 뒤에야 깨달았고, 반성했다. 좋은 의료진이라면, 결코 공감능력을 잃지 않는다. 상황이 익숙한 것은 의료진인 본인뿐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타인이 힘겹게 떠받치고 있는 육중한 무게를 제멋대로 가벼이 여긴다면, 결코 그들에게 좋은 의료진으로 기억될 수 없다. 공감능력이란 노련함만큼이나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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