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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월 Dec 30. 2020

5. 24시간 동안 수액 달고 살기

좋은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독립적인 인간일수록 입원하는 게 더 힘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병원에서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영역임에도 제한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제한해야 하고, 환자나 보호자라면 반드시 협조해야 한다. 그 목적이 바로 우리 모두의 '안전'에 있기 때문이다.


24시간 동안 수액을 달고 산다는 것


 내가 일했던 곳은 소화기관에 질병이 생겨서 입원한 경우가 많아서 대부분 일정기간 동안 치료적 목적으로 금식을 해야 했다. 금식을 하게 되면 당연히 수액의 양이 늘게 된다. 못 먹는 만큼 채워줘야 하기 때문이다. 환자들은 평균적으로 수액걸이에 1~2L 정도씩은 달고 다녔다. 24시간 쉬지 않고 지속 주입되는 수액을 가지고 일상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1. 일단 손이 자유롭지 못하다. 

 바늘이 꽂혀있는 팔은 조금만 힘을 주거나 머리 위로 잠깐 들어 올리기만 해도 금방 붉은 피가 수액줄을 통해 역류되기 시작한다. 수액이 들어가는 줄을 통해 피가 몸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 상태가 조금만 지속되면 피는 굳어버려서 주사는 막히게 된다. 딱딱하게 굳은 핏덩이가 수액이 지나가는 통로를 막아버려서 수액이 못 들어가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주사(아프다!)를 다시 맞아야 하는 불상사가 생긴다. 그래서 간호사는 가능하면 주로 쓰지 않는 쪽의 팔에 주사를 놓으려고 노력한다.

2. 손이 자유롭지 못하니 옷을 갈아입기 어렵다. 

 일단 옷을 갈아입으려면 팔의 구멍을 통과해야 하는데, 병원복이 크고 넓적하며 수액 모양이 좁고 긴 원통형이어도, 1~2L의 액체를 담고 있는 그 두께가 무리 없이 팔과 함께 옷의 구멍을 통과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3. 어디를 가던지 수액걸이와 함께해야 한다. 

 수액걸이는 길고 단단한 장대처럼 생겼고(수액이 몸보다 위에 위치해야 중력에 의해 수액이 무리 없이 몸에 주입될 수 있으므로 보통 사람의 키보다 크다.), 바퀴 서너 개가 달려있어서 가지고 다니면 달달달 굴러가는 소리가 난다. 한마디로 무겁고 시끄럽다.


 건강한 사람도 수액을 달고 다니는 것을 여러모로 불편하게 느낀다. 하물며 통증이 있거나 어딘가 움직임이 제한된 환자라면 두배 세배로 불편할 것이다. 불편하기만 하면 차라리 나을 텐데, 심지어 이것은 안전에도 위협을 가한다. 수액을 맞기 시작하면, 낙상이 발생할 가능성이 급격히 증가하기 때문이다.


좋은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에이, 나 잘 걸어 다녀서 넘어질 일 없어!"

 넘어질 가능성이 적다고 우리는 안심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낮은 가능성이 현실이 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큰 손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본인은 입원기간 동안 넘어지지 않을 거라고 자신한다. 사지가 움직임에 제한이 없다면 확률이 낮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0%에 수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확률을 최소화해야 한다. 우리는 환자와 보호자에게 항상 말한다. '언제든지 도와드릴 테니, 우리에게 말해주세요.'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협조가 잘 안 된다. 의료진을 믿지 않아서도 아니고, 싫어해서 요구를 안 듣는 것도 아니다. 우리를 배려하느라 그렇다.   

1. "혹시 밤에 어디 가고 싶으시면 우리를 부르거나, (콜벨 사용법을 알려드리며) 여기 손 닿으시죠? 이 벨을 눌러주시면 돼요."

 그리고 며칠 뒤 야심한 밤에 쿵 소리가 병실을 울렸다. 기어이 혼자 나오다 넘어지신 것이다. 할머니는 손녀딸 같은 우리가 매번 와서 도와주는 게 너무 미안했다고 했다. 그 마음을 이해하고,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속상했다.   

2. "옷 갈아입고 싶으시면 제가 도와드릴게요! 금방 가겠습니다."

 그리고 몇 분 뒤 환자의 자리에 도착했을 때 수액은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다(심지어 여러 개였다.). 수액 줄은 반쯤 벗겨진 옷과 함께 잔뜩 꼬여 형체를 알 수 없는 한 덩어리가 되어있었다. 젊은 환자가 민망한 듯 나를 보며 허허 웃었다. 나는 익숙한 표정으로(자주 있는 일이므로)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모든 수액과 수액줄을(터지지 않았어도 이미 땅에 떨어져 오염되었으니 전부 갈아야 했다.) 빼고 옷을 갈아입힌 후 다시 새로운 줄과 수액을 연결했다. 유리병으로 된 수액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만일 500ml 병으로 된 수액이 바닥에 떨어졌다면, 깨져서 산산조각 나며 누군가가 다쳤을 수도 있다.)   

3. "수액 줄과 연결된 기계는 절대 임의로 만지시면 안 돼요! 조작은 저희가 하겠습니다."

 어디선가 기계 알람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약물이 투여되는 정맥주사 줄과 연결된 기계는 들어가는 용량을 민감하게 조절해야 하는(대개 용량이 잘못 투여되었을 때 치명적일 수 있는) 약물들의 용량을 정확히 조절하기 위해 사용된다. 알람이 울린다는 것은 어떠한 이유로 용량 주입이 멈췄거나, 잘못된 용량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병실에 들어갔을 때 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기계가 아예 수액줄에서 분리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빠른 속도로 수액줄을 기계에 다시 연결하고 환자에게 들어간 것으로 예상되는 용량을 확인하고 의사에게 알린 후 즉시 함께 환자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환자는 아무 문제없었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으며 왜 말을 안 들었는지(!) 상기된 얼굴로 환자와 보호자에게 물었다. 예측 가능한 대답이 들려왔다.

"매번 이것 때문에 부르는 게 미안해서 그랬어요. 맨날 하는 거 옆에서 보니까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렇게 사단이 날 줄은..."

'내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자 진심으로 나는 아찔하고 무서웠다. 잘못된 용량의 투약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와 보호자의 마음은 또 한편으로 이해가 갔다. 감사하기도 했다. 돈 받고 일을 하는 나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으러 온 환자가 배려해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일은 두 번 다시는 발생해서는 안 된다. 환자 안전은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좋은 의도가 좋지 못한 결과를 낳는다면,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함께 해결해야 할 모두의 문제


 일련의 사건들은 내가 스스로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너무 바쁘게 일했나 싶었던 것이다. (내가 원해서 바쁜 것은 분명 아니었지만) 바쁘단 사실을 감출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의료진이라면 우선순위를 세우고 그에 따라 급하고 중요한 일부터 끝내는 것이 능력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환자와 보호자의 작은 요구들을 묵인하거나 대충 넘겨버리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니다. 나는 스스로 그런 적이 없는지 돌아봤다.(있다는 소리다.) 그런 사소한 경험들이 환자와 보호자에게 쌓였을 것이고, 그러면서 나에게 작은 요구 하나를 어렵게 느꼈을 것이다. 당연한 것을 요구하면서 미안해하는 그들의 태도는 사실, 의료진의 태도에 의해 학습된 결과였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지난 내 행동이 후회가 되었고, 조금 더 성장했다. 국내의 의료진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제도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바쁜 상황 속에서 갖은 고생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코로나 발생 이후에는 그전보다 상상도 못 할 정도로, 훨씬 더 심해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존재 가치와 이유를 다시금 되새길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의료진이 좀 덜 바쁘도록, 제도적 측면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모두가 관심을 갖고 다 함께 노력해야 한다. 의료진은 오늘도 여전히 너무나 바쁘다. 아마 내일도 바쁠 것이다. 이것은 어느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다.


미안하다는 말 대신


 그래도 여전히 미안해하는 환자와 보호자가 있다면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배려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이게 제 일인걸요. 더 좋은 결과를 위해서 우리가 직접 하겠습니다.  좋은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안하다는 마음이 들면, 그 대신 고맙다고 말해주세요. 우리도 환자분이 안전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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