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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월 Dec 30. 2020

6. 처음이라 그렇습니다.

대단하고 유능해 보이는 이들도 한 때 올챙이 시절이 있었다.

 나는 IT기술에 능통하다고 묘사되는 밀레니얼 세대다. 병원에서도 치료적 목적으로 많은 기계를 사용한다. 인공호흡기, 체외 투석을 위한 CRRT장비, 각종 주입 펌프... 그들 모두 용도와 사용법, 생김새가 다 제각각이어서 처음 사용하게 되면 필히 배워야 한다. 또 같은 용도의 장비여도, 만드는 회사마다 생김새나 사용법이 다르므로 매번 다시금 사용법을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긴 학생 시절을 겪어봤기 때문에 잘 알고 있는 사실이 한 가지 있다. 한번 수업을 들었다고 해서 수업 내용 전부를 간파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다. 이론으로 배우고 나서 직접 해보는 과정이 '반복'되어야 결국 '진짜' 능력이 된다. 그러나 병원의 세계는 그런 상황을 이해하고 기다려 줄 수 있을 정도로 녹록지 않다.


처음에는 다 그렇습니다.

 병동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3개월쯤 지났을 때였다. 그 이전에 담당하던 환자보다 조금 더 중한 환자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의사가 새로운 기계를 달아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병동에서는 자주 쓰지 않는 기계였다. 나는 그 기계가 낯설었고 기계의 위치를 찾는데도 한참 걸렸다. 병원 내 자료들을 샅샅이 뒤져내고 사용법을 찾아 여러 번 읽어봤다. 그래도 불안해서 선임 간호사에게도 사용법을 한 번 더 물어봤다. 그러고 나서야 떨리는 마음으로 기계를 들고 병실로 들어갔다. 환자와 보호자에게 사용 목적과 방법을 설명하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기계를 세팅하기 시작했는데...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하는 것은 달랐다. 차근차근 사용법을 머릿속에서 되짚어나가며 세팅하는데, 보호자의 눈이 점점 세모꼴로 변하는 게 내 시야각에 들어왔다. 점점 더 긴장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번씩 그렇게 하는 게 맞냐는, 날 선 목소리의 의심 섞인 질문이 들려오기도 했다.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는데, 갈수록 스스로가 엉망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중압감은 빠르게 몸집을 불리기 시작해서 결국 내 머리를 가득 누르고, 달달 외웠던 순서들도 머릿속에서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결국 세팅을 포기하고 병실을 나왔다. 염치없게 선임 간호사를 찾아가서 대신해달라고 부탁했다. 선임 근무자는 바쁘다며 한숨을 쉬긴 했지만 감사하게도 거절하지 않았다. 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어서 병실의 끄트머리에 슬쩍 들어가 숨듯이 섰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불만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내 귀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기계 하나 제대로 못하는 간호사가 왜 우리 환자를 보게 하는 거예요?"

모든 신규 간호사가 그렇듯, 나도 내가 미숙한 것은 알고 있었다. 일은 너무 어려웠고, 나는 항상 부족했다. 당연히 자신감은 바닥이었다. 그래서 하루에 10시간 넘게 일하면서도 더 일찍 출근해서 공부하고, 더 늦게 퇴근하곤 했었는데, 저 말 한마디에 모든 노력이 무색해지는 것 같았다. 상사가 있는 공간에서 재차 타인의 목소리로 본인의 결함을 확인받는 것은 꽤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이 일을 그만두어야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눈물이 날 것 같지만 참았다. 그런데 기어코 내 눈에서 눈물을 뽑아낸 건 선임간호사의 대답이었다.

"저도 예전에는 못했어요. 여러 번 해보고 나서야 이렇게 하게 된 겁니다. 처음에는 다 그렇습니다. 자꾸 해봐야 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저 간호사도 충분히 잘할 수 있는 간호사입니다."

나는 그 후로도 일을 포기하고 싶어 질 때마다 저 말을 떠올렸다. 병원에서 일하면서 운 날은 많았지만, 이 날 울었던 것은 정말로 잊을 수 없다. 그런 시간이 지나가고, 나는 진짜로 기계 사용법을 후배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간호사가 되었다.


다르다고 틀린 것은 아니다.

 매년 3월이 되면 의대에서 공부를 마친 학생들이 처음으로 진짜 '의사'가 되어 일을 시작한다. 그들은 굉장히 똑똑하고 유능하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적 있지만, 기술적인 것은 그저 아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3월에 병원은 정말 많은 컴플레인을 받는다. 대부분 '기술적으로 노련하지 못함'에 대한 컴플레인이다. 그리고 나름 잘하더라도 경력이 없다는 이유만으로도 실력을 의심받기도 한다.

 같은 대학을 나와 같은 부서에서 근무하더라도 각자가 일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다. 수술이 잦은 외과 병동은 소독을 할 일이 많다. 소독 재료만 수십 가지다. 같은 상처에 쓸 수 있는 재료도 여러 가지여서, 각자가 원하는 것을 선택해서 쓴다. 가능한 범위 내에서 본인의 스타일이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본인이 더 선호하는 재료가 생긴다. 손에 잘 익은 방식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경험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방식은 틀렸다고 종종 오해받는다.


 "다른 의사(혹은 간호사)는 다른 걸로 해주던데 왜 이걸로 해요? 잘못하신 거 아니에요?"

 이런 말을 들으면 사람은 위축된다.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만, 환자나 보호자가 나를 불신하고 있는 것이 피부로 느껴진다. 불필요한 긴장이 유발된다. 다인실이고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다면 신경은 더 날카로워진다. 불신은 빠르게 퍼져나가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러면 잘하던 의료진도 실수할 확률이 급격히 증가하게 된다.


대단하고 유능해 보이는 의료진들도 한 때 올챙이 시절이 있었다.

 한번 응급실을 방문한 적 있었다. 앉아서 기다리다 보니 한 간호사가 와서 정맥주사를 맞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간호사는 약간 허둥지둥 대는 것처럼 보였는데 나는 직감적으로 신규 간호사인 것을 깨달았다. 여러 도구를 준비해서 내 앞에 섰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돌았다. 편안하게 팔을 걷고 내밀었다. 내 혈관은 꽤 잘 보이는 편이었지만 그녀는 첫 번째 시도에 실패했다. 나는 아프지 않은 척하며 괜찮다고 웃으려고 노력했다. 다른 팔을 내밀었고 두 번째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다. 그녀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 얼굴에서 미안함과 절망과 본인에 대한 자책 등 복합적인 감정을 읽었다. 그 감정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세 번째 시도에 가까스로 성공했다. 나는 그 간호사가 기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속상한 얼굴이었다. 계속해서 죄송하다고 했다. 괜찮다고 말해주며 나는 간호사가 조금만 덜 속상해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경험들이 쌓여서 유능한 간호사로 성장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험 없는 의료진이 병원에서 경험을 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는 대부분이 동의한다. 그렇지만 막상 케어를 받게 되면, 본인이나 본인의 가족은 노련한 의료진에게 받기를 원한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심리다. 그래서 사실 경력이 없는 상태에서도 충분히 능숙하게 할 수 있도록 학교에서 배워오는 것이 베스트다. 그런데 국내 현실에서 그게 가능한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정말 힘들다. 선진국에 비해 시뮬레이션 과정이 현저히 적고, 전반적인 교육 인프라가 많이 부족하다. 나 역시 실제 사람에게 정맥주사를 해본 것은 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한 이후이다. 학교에서는 오직 마네킹을 대상으로 연습한다.  최근에 많이 나아지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서로의 믿음이 최선의 결과를 낳는다.

 우리가 수술받고 싶은 외과의는 선택할 수 있지만, 병동에서 본인을 관리해주는 주치의나, 혹은 소독이나 각종 술기를 담당해줄 인턴 또는 간호해줄 담당 간호사 등을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의료진 입장에서도 똑같다. 본인이 케어 하고 싶은 환자를 고를 수 없다.(물론 예외가 있을 수는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하는 것이다.  일단 한 번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했으면, 맘에 안 드는 요소가 눈에 띄더라도 그곳에서 일상을 영위해야 한다. 그러므로 의료진이 조금 미숙해 보이더라도, (물론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선이라면) 너그러운 눈빛을 보내주는 건 어떨까. 미숙한 것처럼 보여도 그들은 분명히 필요한 자격과정을 통과한, 이 일을 오랜 시간 준비해 온 전문 의료인이다. 지레 겁먹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먼저 따뜻한 눈길을 보내면 의료진은 가진 능력을 충분히 펼칠 것이다. 최선의 결과는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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