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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월 Jan 13. 2021

8. 염색이 뭐 어때서요?

복장 규정을 바꿔보니

 대학병원에서 장기 환자의 경우 몇 달에서 길게는 몇 년간 입원하며 투병생활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들 중에는 거동이 불편하거나, 치료를 위해 연결된 수액이나 기계 때문에 쉴 새 없이 길어지는 머리카락을 관리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그래서 내가 몸담고 있던 병원에는 작은 미용실이 내부에 달려있었다. 편의를 위해 머리를 자르기도 하지만, 우리는 종종 미용실에서 그 이상의 의미를 찾는다. 생김새가 바뀌면 사람의 마음가짐도 영향을 받는다. 머리를 자르고 염색을 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면, 우리는 새로운 자아를 만끽하는 기분도 들고, 스트레스가 풀리는 느낌도 받는다. 병원 내의 미용실은 분명 단순한 '편의' 시설 그 이상의 역할을 한다.


머리망과 능률의 상관관계?

 많은 회사들은 직원들이 자유로운 주제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사내 게시판을 운영한다. 우리 병원도 그랬다. 어느 날 어떤 간호사가 올린 글 하나는 단숨에 '떡상'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 제목은 이것이었다.
<간호사는 왜 머리망을 해야 하나요?>
 간호사 대부분 아무 거리낌 없이 머리망을 했다. 나도 그랬다. 막상 하고 나면 불편함이 많았다. 머리가 빠지고, 당겨서 불편했으며, 머리가 길수록 쉽게 모양이 흐트러져서 여러 번 다시 해야 하는 귀찮음을 감수해야 했다. 근데 글을 보기 전까지는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서, 불편하다고는 불평할 생각도 못했다. 글의 전체적인 논지는 그것이었다. 규정이 <긴 머리는 머리망을 해야 한다>가 아니라 <간호사는 머리망을 해야 한다>였는데 이는 목적성이 불분명하다는 것이었다. 머리가 긴 의사도 소독을 비롯해 무균적 처치를 하는데, 그런 규정이 없다. 굳이 머리망이 아니어도, 머리끈만으로도 일에 지장이 없도록 머리를 정리할 수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그런데 왜 간호사는 일률적으로 머리망을 해야 할까? 나는 글을 다 읽자마자 작은 탄식을 내뱉으며 홀린 듯이 빠르게 댓글을 달았다. <공감합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댓글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간호사들 사이에도 갑론을박이 일었다. 결국 이 사태를 본 임원진은 각 병동에 의견을 묻고 취합했다. 이내 머리망 착용은 간호사 복장 규정에서 삭제되었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머리망 없이 일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머리망이 없어도 문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머리망을 없애자 업무 만족도가 올라갔다. 머리망을 왜 안 하냐고 불만을 표출하는 고객은 당연히(혹은 다행스럽게도?) 단 한 명도 없었다. 머리망과 일의 능률은 사실상 반비례 관계다. 쓸데없는 규정이 우리를 옥죄고 있었는데, 익숙함에 가려서 몰랐던 것이다. 


염색이 뭐 어때서요?

 신규 간호사 시절에는 항상 검은색 머리를 했다. 그때는 사실 있는 에너지의 전부를 일에 쏟아붓느라고 다른 생각을 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다 1년이 지나고 적응하기 시작하자 문득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헤어 컬러를 바꾸면 나는 괜히 새롭게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 기분을 다시금 느껴보고 싶었다. 그래서 염색했다. 빨간색으로.

 출근하자마자 나는 다수의 뜨거운 눈길을 받았다. 어머 염색했네? 이런 색깔로 염색해도 되나? 좀 그렇지 않니? 나는 굴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복장 규정에 머리 색깔에 대한 제한은 없었고, 내 머리색은 일하는데 조금도 지장을 주지 않았다. 당시에는 나 혼자였지만 요즘에는 분홍색 머리나 주황색 머리를 한 간호사를 가끔 병원에서 발견한다. 사회가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한 것과 당연하지 않은 것

 나는 손톱은 항상 짧게 유지하고 그 무엇도 바르지 않는다. 처치 중에 매니큐어 조각이 환자에게 떨어질 수도 있고, 일단 긴 손톱은 잘 씻는다고 해도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기 어려우며 처치 중에 환자가 다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업무에 지장을 줄 수도 있는 영역인 것이다. 하지만 머리는 다르다. 내 머리가 길던 짧던 검은색이던 빨간색이던 아무 지장도 주지 않는다! 


한 때 캡을 쓰는 게 간호사의 본분이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간호사를 떠올렸을 때 누가 캡을 떠올리는가? 이제 캡을 쓴 간호사는 병원에 없다. 시대는 변했다. 

캡을 쓴 간호사는 이제 과거를 기억하는 동상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시대는 지금도 변화하고 있다. 시대가 변하면 기준도 변한다. 당연하던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간호사는 단정해야 한다.> <단정함의 기준은 이런 것이다.> 하는 명제들 중에 시대가 바뀌어도 절대적으로 유지될 만한 것이 있을까? 

 사내 게시판에 글을 올렸던 그 간호사가 누군지 알 수 없지만(익명으로 올렸으므로) 나는 그가 분명 남들보다 앞서 나가는 삶을 살고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근거를 찾아나가는 사람은 익숙함에 가려진 진실을 볼 수 있다. 그런 과정이 모여 세상은 변화한다. 다른 조직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병원은 상대적으로 규정이 많고 변화하지 않는 안정성을 추구한다. 하지만 일의 능률을 올리고 조직을 오랫동안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병원에서도 스스로 이런 질문들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여전히 당연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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