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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월 Jan 10. 2021

7. 여기는 호텔이 아닙니다만...

나의 트라우마

 간호학과에는 '기본간호실습'이라는 과목이 있다. 맨 첫 페이지에는 '베드메이킹'이 적혀있다. 환자가 사용한 시트를 가는 것부터 배우는 것이다. (물론 대략 10년 전 이야기이므로 지금은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병원에서는 간호조무사 분들이 해주시는 경우가 많지만, 병원에 따라서 간호사가 하는 곳도 있다.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이러한 환경 관리는 매우 중요하다. 나이팅게일이 환경 개선만으로도 병원 내 사망률을 극적으로 줄였던 것처럼. 하지만 가끔은, 치유를 위한 환경 관리 그 이상의 요구를 받기도 한다.


병원이라서 그렇습니다만.

 한 보호자가 간호사 스테이션으로 와서 그런 요구를 한 적이 있다. 침구류(시트와 이불)을 매일 교체하고 정리해달라는 것이었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어렵다는 의료진의 말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의료진이 환자의 위생에 신경 쓰지 않는다며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개인위생이 목적이라면 우리는 집에서도 매일같이 침구류를 세탁하는가? 아마 아닐 것이다.

 우리는 위생 관리를 위해 깨끗한 시트를 비롯한 환경을 제공한다. 즉 체액이나 분비물이 묻거나 필요한 경우 깨끗한 물품을 새로이 제공한다. 그것을 깨끗하게 사용하고 정리하는 것은 환자와 보호자의 몫이다. (물론 거동이 불편하거나 의식이 제한되는 중환자의 경우는 예외다.) 물론 고객에게 편의를 위한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 있다. 호텔이다. 그러나 병원은 호텔이 아니다.

 간호사는 환자에게 가장 접근성이 좋은 의료인력이다. 병실만 나가도 쉽게 마주칠 수 있다. 환자는 필요한 요구는 대개 간호사에게 말한다. 그중에는 가끔 난감한 요구들도 있다.


1. 너무 다른 너와 나의 온도

 6인실의 한 보호자가 나와 너무 덥다며 병실 온도를 낮춰달라고 요구했다. 간호사는 온도를 조정한다. 얼마 후에 다른 보호자가 춥다고 나온다. 다시 온도를 올린다. 덥다던 보호자가 다시 나온다. 그렇게 우리는 갈등 상황에 직면한다.


2. 치료를 위한(?) 마운틴뷰

 내가 있는 병원의 6인실은 한 면이 통유리창이고, 그 맞은편에 병실 입구가 있었다. 입구 양 옆으로 침대가 세 개씩 나란히 놓여있었다. 즉, 창가 자리는 6명 중 2명만이 선점할 수 있었다. 인기 있는 창가 자리는, 처음 입원할 때 차지하지 못하면 퇴원할 때까지 갖지 못한다. 그게 병원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이유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자면, 환자 한 명이 자리를 이동하는데 소모되는 비용이 크다. 의료 인력 몇 명이 붙어서 한참의 시간을 써야 한다.) 그런데 가끔 그 규칙을 어기면서라도 자리를 바꿔달라며 강하게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근거는 환자의 회복이다. 안 된다고 설명하면 또 한 번의 소모적인 언쟁이 시작된다.


3. 옆 자리 환자나 보호자가 코를 안 골게 하는 법

 모른다. 알아도 해결하기 어렵다. 이러한 생활 소음 통제는 의료진의 능력 밖이다. 그런 이유로 병실을 바꾼다고 해도 그 병실에 코를 고는 사람이 없다고 장담 못한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의료 인력을 소모하는 것은 사실상 낭비다.


 의료진의 소진(burnout:극도의 피로감)은 코로나 발생 이후에 새롭게 제기된 문제가 아니다. 오랫동안 제기되어 왔고,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이러한 요구들은 의료진의 소진에 단단히 한몫을 하고 있다. 전문적인 업무 영역을 벗어난 요구를 받으면 황당하고, 전문인력으로서의 자존감이 떨어지며 회의감이 든다. 그래도 안 된다는 설명을 했을 때, 알겠다는 비교적 온화한 대답이 들려오면 간호사는 안도한다. 안 된다는 말에 동의하지 못하고 온갖 감정을 뿜어내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기 때문이다.


트라우마

 미국에서는 병동 간호사 1명당 환자 4명~6명(평균 5.3명) 정도를 담당하지만 국내에서는 12명~20명(평균 16.3명) 정도 담당한다.(2019년 자료) 병동에 있는 16명의 환자는 모두 간호를 필요로 하고, 간호사는 그 모두를 동시에 할 수 없다. 그래서 우선순위를 매긴다. 더 중요한 일부터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떤 환자의 (의료진의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처치는 늦어지게 된다. 많은 환자들이 이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


 암병동에서 일할 때 이야기다. 한 남자 보호자가 수액을 빨리 연결해달라고 했다. 나는 당시에 매우 바빴다. 내가 담당하는 환자 중에는 그보다 중한 환자가 열 명이 넘었다. 당장 오늘 수술한 환자들 사이에서 내시경 예정인 (상대적으로 건강한) 환자의 수액을 연결하는 것은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려있었다. 조금 이따 달겠다고 설명하고 바쁘게 일했다. 하루 종일 밥도 못 먹고 화장실은커녕 한 번도 앉지 못한 채로 일했다.(사실 간호사가 밥 못 먹고 일하는 것은 일상이긴 하지만.) 삼십 분 정도 지났을까, 그 보호자가 다시 벨을 울렸다. 한 번 벨을 누르면 정해진 음이 나오는데, 정해진 음이 시작되기도 전에 계속해서 첫 음이 반복되었다. 빠르게 여러 차례 누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급한 일이 생긴 줄 알고 병실로 뛰어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내 주변으로 잡다한 물품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남자 보호자가 물건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지고 있던 것이다. 귀에 큰 소리가 꽂혔다. 왜 수액을 빨리 안 놔주냐는 얘기였다.

 큰 소리와 난동을 본 동료 간호사는 빠르게 보안 요원을 불렀고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아무것도 못하고 서있었다. 내 발 옆으로 계속해서 자잘한 물건들이 떨어졌다. 보안 요원이 도착하자마자 보호자는 하던 것을 중단하고 씩씩댔다. 주치의가 오고, 수간호사가 오고,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와중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울기만 했다. 이것은 벌써 몇 년 전의 이야기지만 나는 여전히 그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목소리와, 분위기와, 내 발치에 떨어지던 물건들과 더불어 바닥을 치는 나의 감정들. 어떤 사람은 흘려들으라고 말했고 또 어떤 사람은 저런 사람 흔치 않다고 얘기했지만,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고 넘기기에는 내 마음의 출혈이 너무 컸다. 더 불행한 것은 이 경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특별한 경험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매년 반복되는 비슷한 경험을 했다. 아마 올해에도 비슷한 경험을 할지도 모른다. 반복되어도 적응되지 않는다. 이런 강렬한 기억은 머릿속에서 수십 번씩 생생하게 재생되며 내 감정을 갉아먹는다. 트라우마다.


안 된다는 말이란, 떼를 쓰고 소리를 질러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안 된다는 설명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진정으로 어려운 것은 안 되는 것을 되게 해 달라는 요구다. 안 된다는 것을 이미 말했는데 재차 설명해야 되기 때문이다. 간호사의 입장에서 보면 환자 대부분 자신만의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환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사연이 굉장히 특별하게 느껴진다. 우리 환자는 조금 더 상태가 중하니까 신경 써서 해주세요, 나이가 더 많으니까 해주세요, 젊은데 고생하는 게 안타까우니까, 기저 질환이 많으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금식이 길어서 힘드니까, 거동이 남보다 불편하니까 등등. 나도 그 마음은 십분 이해한다. 환자로 입원하면 당연히 본인이 제일 힘들다. 힘드니까 이 정도의 특별한 배려(?)는 받아도 될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런데 사실 이곳은 그런 환자들이 잔뜩 모여있는 병원이다. 하나의 이유로 공동의 규칙을 어기면, 그것은 규칙을 어길 또 다른 이유가 되어버린다.


 그런 규칙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소통이 가능한 창구로 가면 된다. 대부분의 병원은 고객의 소리를 듣기 위한 적절한 창구를 가지고 있다. 안 된다고 하는 의료진에게 떼를 쓰고 소리를 질러도, 결국 안 되는 것은 안 된다. 규칙은 함께 만든 것이고 의료진 개인에게는 그것을 마음대로 깨부술만한 이유도, 능력도 없다. 떼를 쓰고 소리를 지르는 과정은 그저 서로를 소모시키고 힘들게 만들 뿐이다. 담당 의료진이 가장 접근성이 좋은 것은 맞지만, 그러한 요구를 하고 싶거든 귀찮음을 감수하고서라도 적절한 곳을 찾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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