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다들 군말 없이 다니는데. 불만 갖는 네가 이상한 거야
일 년에 두세 번가량 진행되는 정기 면담은 하고 나면 항상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내 상사는 듣고 싶은 말이 내 입에서 나올 때까지 면담을 끝내지 않는 타입이었다. 나는 야간 근무(11pm~8am)를 일찍 끝내고 시작한 면담에서 오전 10시가 넘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면담을 하게 되면 부서장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빨리 알아채서 일찍 끝내는 게 목표가 됐다. 그러면 조금 더 빨리 쉴 수 있었으니까. 찝찝한 기분은 아마 잔여감이었던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은 시원하게 분출되지 못하고 입안에서 뱅뱅 맴돌기만 했으니까.
한 번은 야간 근무 후 진행된 면담 때 피곤하여 넋이 나간 나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는지, 부서장이 갑작스레 화제를 전환하며 병동의 문제점이나 힘든 것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했다. 머릿속에 그간 생각해온 목록이 잔뜩 떠올랐지만 말하면 안 될 것만 같은 느낌에 머뭇거렸다. 그런 내 상태를 보더니 부서장은 웃으며 말했다. 괜찮으니 얘기해봐. 그래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확실하게 말하건대, 그것은 어리숙한 사회 초년생의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것을 깨닫기에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고 어리석었다.
각종 불합리함이 왜 문제인지, 시스템이 어떻게 잘못되어 있는지, 그 덕에 간호사들이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쉴 새 없이 나열했다. 말하고 싶은 것을 그간 어떻게 참았나 싶을 정도로 나는 신이 났다. 근무표가 과도하게 불균형하고, 병동 내 문제 상황 발생했을 때 보고하는 체계가 부정확하고, 의료진끼리 의사소통이 어긋나는 일이 잦고, 공동으로 세운 원칙이 윗사람들에 의해 무시되고... 모든 내용이 하나같이 부서원들 사이에서 한 번 이상 문제 제기가 되었던 것들이었다. 부서장은 잘 들어주는듯했다. 솔직한 마음을 풀어나가며 누군가와 공유하는 시간은 짜릿했다. 내 이야기를 듣던 수간호사는 몇 번 변명 같은 말을 했다. 그건 다른 병원도 다 그래. 다른 병동도 똑같아. 그건 그동안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 나는 어리석게도 말을 쉬지 않았다. 그러다 그녀가 문득 내 말을 자르며 이렇게 말했다.
네가 그런 걸로 그렇게 힘든 줄 몰랐네. 정신과 진료라도 받아보는 게 어떠니?
신나게 돌아가던 뇌가 회전을 정지했다. 정신과 진료에 대한 반감이나 편견이 있지는 않았으나, 권유받은 타이밍이 너무 불쾌했다. 나의 정신건강을 진심으로 걱정한 게 아니라, 체면을 세우느라 직설적으로 꺼내지 못한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다들 불평불만 없이 잘 다니는데, 너 진짜 이상하구나. 문제는 조직이 아니라 너야.
사회생활 못하는 사회초년생은 그제야 정신 차리고 완곡한 표현으로 제안을 거절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네 자존감이 많이 떨어진 것 같다면서 병원 측에서 지원하는 교육이 있으니 들으라고 했다. 대답을 듣기 전에 먼저 내 이름을 교육 신청서에 넣었다. 거절할 수 없었다. 명백한 강요였으므로. 주제는 <회복 탄력성>이며 다녀온 간호사들의 후기가 좋다는 말도 덧붙였다. 조직과 시스템의 문제를 피력했을 뿐인데 왜 갑자기 떨어진 자존감이라는 뜬금없는 결론으로 이어진 걸까? 수간호사는 날 위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나는 등 뒤로 소름이 돋아남을 느꼈다. 그녀는 완벽하지 못하게 가식을 떨고 있었다.
소중한 오프를 희생하면서까지 교육을 듣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지만, 면담을 당장 끝마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적당히 알겠다고 하고, 나와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슬픈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시스템이 잘못된 것을 인지하고 문제 삼은 개인은 병원 사회에서 부적응자나 문제아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병원 입장에선 조직이나 문화를 바꾸는 것보다 문제 삼는 개인을 바꾸는 게 쉽다. 옳고 그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날 조직이 마치 아무리 밀어도 밀리지 않는 거대한 바위 같다고 느꼈다. 왜 높은 연차의 간호사들이 조직의 방식에 대해 투덜대고 불평할지언정 조직에게 직접 문제 삼지 않는지 깨달았다. 미미한 영향력의 개인은 거대한 조직 아래 필연적으로 굴복한다. 무력감을 느끼는 개인은 조직의 방식과 스스로를 일체화하거나, 혹은 도망친다. 퇴사는 도피의 좋은 수단이 된다.
회복탄력성 교육은 입바른 소리만 줄줄 읊어주는, 인기 없는 자기 계발서 같았다. 화나면 멈춰 서서 심호흡하세요. 따위의 방법론을 들으며 나는 구석 자리에서 혼자 입을 비죽였다. 누가 그걸 몰라서 못하니? 바쁜 와중에 잘도 그럴 여유가 있겠다. 강사가 한 명 한 명 손가락을 노트북에 가져다 대게 하며 이제부터 스트레스 수치를 측정하겠다고 할 때도 똑같았다. 혈당 측정도 찌르지 않고서는 못하는 마당에 복합적인 기전으로 작용하는 스트레스를 손끝으로 어떻게 감지하겠다는 거지? 기껏해야 맥박 수나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시간의 모든 것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교육은 물론 들으나마나였다. 교육을 받을 의지가 없는 사람을 앉혀놓고 교육하는 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스스로도 시간과 에너지가 너무 아깝게 느껴졌다. 점점 더 늘어나는 스트레스와 짜증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지루한 교육이 끝나갈 때쯤 6명씩 조를 이루어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와 함께 하게 된 5명 중에 얼굴이 익숙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시작할 때 5명 모두의 표정이 나와 비슷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내 눈과 귀가 조금씩 트이기 시작했다. 재밌는 것은 다른 조원들도 똑같이 비슷한 순간부터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우리의 이야기는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었다. 불합리한 조직문화, 권위적인 사고를 가진 상사, 일에서 느끼는 부담감... 우리의 수다는 교육이 끝나고도 끝없이 이어졌다. 그제야 나를 끈질기게 짓누르던 스트레스가 점차 가시는 것을 느꼈다.
자기 계발서는 변화하려는 의지나 목적이 분명한 사람에게 좋은 수단이 되어줄 수 있다. 하지만 지치고 상처 받은 사람에게는 남아있는 의지나 목적이 있을 리 없다. 그런 이들에게 자기 계발서는 아무런 효용이 없다. 차라리 따뜻한 공감 에세이를 쥐어주는 게 낫다. 정말 힘들겠다. 네가 이상한 게 아니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는 이렇게 비슷한 연차의 간호사들에게 공감의 힘을 얻으며 퇴사를 구체화해나갔다. 일하면서 동시에 퇴사 이후를 상상하며 구체적인 퇴사 계획을 짜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이런 공감의 시간 없이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되어 버리면 '응급 사직'의 결과가 나온다. 단 하루라도 더 출근하는 게 버거워지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비매너가 아니라, 조직이 그만큼 직원 관리를 못했음을 반증하는 사례다.
1~3년 차 간호사의 이직률이 전체 간호사 이직률의 66.5%를 차지한다는 2018년 통계가 있다. 그만둔 10명 중 7명이, 입사한 지 3년 이내에 그만두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3년 이내에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알아야 문제를 바로잡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조직 안에서 쉽게 묵살당한다. 묵살할 근거는 차고 넘친다. 아직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네가 뭘 안다고 그러니. 병원은 원래 그런 곳이야. 어딜 가나 다 그래. 우리 때는 더 심했어. 몰이해 속에서 간호사들은 오늘도 도피를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