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욕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인간은 동물인데 동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욕망’이 아닐까. 이 욕망은 어디에서 올까? 자크 라캉은 욕망은 결핍에서 온다고 했다. 인간은 태어나 본능적으로 욕구가 생긴다. 동물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그 욕구는 다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필연이다. 인간이 자신의 욕구를 누군가에게 요구하였을 때, 혹은 요구하고 싶었으나 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났을 때 결핍이 생긴다. 그리고 그 결핍의 상태는 ‘아, 없는가 보다, 안 되는 건가 보다’하고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겨질 수도 있으나 몇몇의 어떤 것은 욕망이라는 단어에 사로잡힌다. 개나 닭이나 소가 자신의 욕구를 요구하다 좌절(동물이 좌절할지는 잘 모르겠으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해도 그것이 욕망으로 이어지질 않음을 동물을 키우면 쉽게 알 수 있다. 단지 본능에 충실히 따를 뿐이다.
라캉은 이 욕망은 무의식에 남아 결코 충족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이 태어나면 거울단계로 눈으로 세상을 인식한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아를 형성해간다. 이때의 세상을 상상계라고 한다. 그리고 금지, 통제, 제도, 규칙, 법, 문화를 통해 질서의 세상 속으로 진입하게 된다. 즉, ‘아버지의 법’이 작동한 것이다. 이때를 상징계라고 한다. 이 상징계에서는 말로 세상을 포착, 인식한다. 구획을 나누고 구분을 짓는다. 그래야만 편하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에서 포기되어지고, 탈락되는 것이 생긴다. 그러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상징계에서 잘 살면 되는데 (물론 그런 유형의 사람도 있다) 인간은 포착되지 않는 영역에 대해 지속적으로 욕망한다. 이를 실재계라고 한다. 즉, 주이상스를 따르고 싶어한다. 주이상스는 한 마디로 고통이라고 할 수 있지만 고통으로부터 즐거움을 얻기에 결국 최고점의 즐거움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주이상스는 자신이 원해서 찾기도 하지만 강제적으로 환경에 의해 오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도 물론 그렇겠지만 후자의 경우는 현재의 시점에서 죽음의 충동을 일으킬만한 극한 고통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지점을 넘어 새로운 세상으로 진입하게 되면 이전에 느끼지 못한 새롭고 높은 차원의 즐거움을 맛 볼 수 있다. 인간은 그것을 포기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닐까?
‘need’와 ‘desire’은 느낌이 많이 다르다. 마케팅에 대한 책을 보면 고객의 need를 파악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고객의 필요를 알고 그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때 마케팅은 성공할 수 있다. ‘desire’은 ‘need’를 넘어선다. ‘desire’이라는 단어를 계속 되뇌이면 ‘need’를 말할 때와 다른 어떤 느낌이 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의 이미지가 오브랩된다. 가슴 속에 욕망이 꿈틀 거리면 잠을 잘 수가 없다. 일상을 그냥 일상으로 놓아둘 수가 없다. 상징계에서 그저 그렇게 만족하며 아버지의 법(이 사회가 규정한 모든 질서)에 잘 순종하여 살 수가 없어진다. 스스로를 고통의 자리로 이끌고, 기존의 것들을 깨부수게 된다. 순탄한 일상을 순탄하게 내버려두지 못한다. 마치 ‘와신상담(땔나무에 몸을 눕히고, 쓸개를 맛본다)’하는 모습이다.
내게 있어 결핍이 낳은 욕망은 무엇일까?
내가 열 살이 되던 3월 8일 5일마다 돌아오는 장날, 나의 열 번째 생일 4일 전, 아버지는 집을 떠났다. 그리고 나의 아들이 열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왔다.
아버지는 ‘그리스인 조르바’ 같기도 하고, 「배따라기」 속 아우 같기도 한 방랑의 DNA를 가진 그런 사람이었다. 본처를 버리는 여느 남자들처럼 다른 여자들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성실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동리에서 인정받는 일 잘하고 책임감 넘치는 젊은 농부였다. 외삼촌의 말에 따르면 결혼 한 그 다음 해부터 서울 외삼촌 집에 홀로 들이닥치곤 했단다. 아빠는 혼자 그렇게 불현듯 며칠씩 사라졌다 돌아오곤 했다. 그런데 내가 열 살이 되던 그 해는 영영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이십여 년.
아버지가 돌아온 후 엄마와 아버지의 싸움은 이십여 년 만에 또 시작되었다. 싸움은 단순했다. 왜 집에 오자마자 발을 씻지 않느냐, 나물을 무칠 때 왜 위생장갑을 끼지 않느냐, 왜 그리 일찍 일어나 시끄럽게 하느냐, 왜 그렇게 설거지를 하느냐……. 정말 유치한 그 싸움을 얼굴만 보면 하였다. 어렸을 때는 그 작은 싸움이 커져 폭력으로까지 번졌으므로 난 골방에 처박혀 있거나 근처 할머니집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이제 난 커버렸다. 이제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내 속에 가라 앉아있던 그 상처의 찌꺼기들이 마치 구정물 속 먼지들이 일어나듯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 찌꺼기들은 고스란히 아들에게 갔다.
요즘 엄마들 말에 따르면 신내림을 받는다는 초등 3학년. 무슨 중2 사춘기처럼 행동하는 아들. 고작 3학년이 공부 스트레스가 심하다며 문을 꽝 닫고 들어가질 않나,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앉아서 레고를 피융피융 하며 가지고 놀지를 않나(옆에서 지켜보면 꼭 미친 것 같다), 엄마의 말은 항상 건성으로 듣고 단 한 가지도 곧바로 하지 않고, 가방은 늘 쓰레기통에다가, 사 주는 모든 야구공은 다 잃어버리고 돌아온다. 게다가 문구점에서 레고까지 훔쳐 문구점 사장님께 딱 걸리기까지. 하나하나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도둑질까지 한 그날, 난 정말이지 엄마를 사표내고 싶었다. 엄마의 말을 거역한 적 없는 나. 엄마가 말하기 전에 스스로 다 해버린 나로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의 연속이었다.
아들을 붙들고 울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매를 들기도 해봤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더 이상 눈을 마주치기 싫을 정도로 아들이 미워졌다. 주위사람들은 그것이 다 나 때문이라 하였다. 내가 아이를 어릴 때부터 돌보지 않고 일을 해서 그렇단다. 모두 다 내 탓, 내 탓……. 난 죽고만 싶었다. 그동안 공부하며, 돈 벌며, 죽을 듯 아들을 키웠는데 다 내 탓이란다. 누구 하나 그 어려웠던 시기에 분유 값 한번 보태주지도 않았는데 애 내팽개치고 돈 버는 나쁜 엄마, 자기 하고 싶은 공부 하느라 애도 뒷전인 나쁜 엄마 낙인은 나를 미치게 했다. 억울하고 분했다.
아버지가 돌아오면서 난 그 분노가 터져버렸다. 어쩌면 어린 날부터 묵었던 그 분노. 어떤 심리강연자가 그런 말을 했다. 부모가 어릴 적 어떤 시기에 심한 상처를 받았다면 자녀가 그 나이쯤 되었을 때 그 분노가 표출될 때가 많으니 자신이 자녀에게 화를 내고 있다면 자신의 그 나이 때 어땠나를 생각해보라고. 나의 경우 신기할 정도로 맞아서 그 강연을 들으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열 살, 아버지의 부재로 난 한 달 동안 말을 잃었다. 이름도 잃었다. 난 하주은이 아니라 어딜 가나 집나간 하태수의 딸, 사기꾼 하태수의 딸로 통했다. 학교를 가도, 동네를 다녀도 쑥덕쑥덕. 아버지에게 돈을 떼인 사람들은 날마다 우리집 대청마루며, 마당에 드러누워 대성통곡을 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나를 예뻐해주던 동네 할머니, 아저씨, 심지어 삼촌을 비롯한 친척들도 외면했다.
그렇게 나의 사랑스런 아들이 미워지고, 미워지는 그 시간들. '난 이런 환경 속에서도 알아서 잘했어. 넌 도대체 왜 그러니. 이렇게 내가 최선을 다해 완벽하게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데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원망들. 누구에 대한 원망인지, 분노인지 구분이 안 되는 뒤섞인 감정들. 그 사이 아들은 서서히 게임에 중독되어갔다.
어느 날 아들에게 너무 실망하여 고함치며 또 매를 들려는데 아들의 눈이 보였다. 무서움에 떠는 짐승 같은 눈. 난 너에게 이렇게 무서운 존재가 되었구나, 아들아.
찰흙으로 무얼 만들기는 쉽다. 말랑해서 내가 하고자 하는 대로 잘 만들어진다. 아직 딸은 그런 찰흙의 상태였다. 그런데 이미 아들은 굳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늦지는 않았다. 완전히 말라 건드리기만 해도 부러지는 그런 상황은 아니니 물을 발라 살살 문지르며 다시 또 변형시킬 수 있는 흙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그럼 물은 뭘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아들을 이해해 보려고 별의 별 강연을 다 뛰어다니고, 책도 읽고, 안 해 본 게 없었다. 그야말로 엄마의 발악이었다. 결론은 이것이었다. 엄마의 기도와 여행. 나는 이 두 가지로 축소했다. 아픈 손가락이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은 인지상정. 아들을 생각하며 기도했다. 지금의 아들이 아니라 미래의 아들을 생각하며 말이다. 그래서 아들을 바라보며 이제 기대한다. 현재의 이 아이가 아닌 미래의 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기뻐진다. 그렇게 내 마음을 치료하고는 이제 아들을 치료해야 했다. 그것은 바로 ‘여행’.
조금씩 아들에게 여행이란 물을 발랐다. 굳어진 아이의 마음에 물을 발라 살살 문지르자 아이의 눈이 방긋방긋 웃었다. 동시에 내 속의 ‘어린 나’에게도 물을 바른 것이었다. 나에게 있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방랑병의 DNA. 아버지의 부재로 치열한 십대를, 이십대를 보내느라 그것을 거의 표출해본 적이 없었다. 돈에 쫓기고, 시간에 쫓겨 여행이란 사치였다. 나의 가장 호화로운 생활은 방에 틀어박혀 책 속 여행을 떠나는 것 뿐.
서른의 중반쯤 되니 비록 부자는 아니어도 아이를 위해서 방랑병 유전자를 써먹을 만큼은 버니 이제 그러기로 결심했다. 사실, 처음 이런 마음을 먹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학원가에서 밥벌이를 하는 나로서는 아들이 한가한 방학은 엄청 바쁜 특강 시즌이었고, 주말의 수업을 포기한다는 것은 수입의 절반을 포기한다는 것이었다. 일을 내려놓고, 돈을 내려놓고 아이들과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은 다들 나를 이상히 여겼다. 욕하는 사람도 있었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혹은 여행 다니는 것 보니 살만한가, 보다 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이들과 내 속의 작은 아이를 데리고 여행을 시작했다. 책 한 권 손에 들고 토요일마다, 쉬는 날마다 어디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공원이든, 산이든, 어디든. 가까운 데에서부터 먼 곳 까지. 국내 구석구석, 때로는 해외도. 그렇게 4년. 나의 아들은 이제 나를 보고 웃는다. 나를 보고 마음껏 조잘거린다. 그렇게 시간을 함께 한 우리.
처음 아들은 얼굴 한번 들지 않았다. 자기 운동화만 보며 걷는 아이. 산 아래 서서는 “내가 저기 위엘 왜 올라가야 해요? 가봤자 놀 것도 없는데.”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차가운 얼굴을 보며 스토리를 만들었다. 모든 자연에 스토리를 입혔다. 함께 역사책을 보며 기와 하나에 얽힌 이야기, 뱀딸기가 왜 뱀딸기인지, 엄마는 어릴 때 이 뱀딸기로 소꿉놀이도 참 많이 했는데, 그런 이야기. 돌 하나, 나뭇가지 하나 쳐다보며 오래오래 그것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다. 그러면 애초에 목적한 곳을 못 가기도 했고, 가다가 어둑해 돌아오기도 했고, 예상치 못한 새로운 곳을 만나기도 했다. 어느 순간 푹 숙여진 아들의 고개가 들리기 시작했다. 하늘의 구름을 보며 조잘 거리는 아이, 나무결 하나하나를 만져보는 아이, 정자 하나, 비석 하나의 스토리를 궁금해 하기 시작한 아이.
그런데 참 이상하다. 여행을 하면서 아이들만 바뀐 것이 아니다. 제일 크게 바뀐 것은 나였다.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 때 나는 디스크 파열로 수술을 받았다. 남들은 요즘 많고 많은 게 디스크환자인데 무슨 대수냐고 한다. 수술하면 바로 낫는 병인데, 하고 말이다. 당시 나는 하루 18시간씩 수업을 했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가게와 집에서 쫓겨나고 겨우겨우 얼마의 돈으로 월세집을 얻어서 살고 있는 때였다. 둘째 아이는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고, 남편은 수입이 없었고, 같이 사는 친정엄마는 갑상선암에 걸려 수술하고 요양중이었다. 엎친데 덮친격. 어떻게 이렇게까지 될 수 있나 싶은 어렵고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학교일이며, 과외며, 학원 일이며 닥치는대로 했다. 그렇게 1년쯤 살아내니 남편도 새로운 일을 시작했고, 나도 내가 하는 영역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아 일하는 시간을 좀 줄여도 더 수업료를 받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일어날 수가 없었다. 몸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둘째 아이를 낳고 허리가 아프긴 했지만 허리부터 발가락 끝까지 온 몸에 고통의 뱀이 칭칭 감고 있는 듯 어떻게도 할 수 없었다. 누워있어도, 서 있어도, 앉아있어도 고통은 없어지지 않았다. 어떤 자세도 고통을 줄여주는 자세가 없었다. 병원에서는 두 군데의 디스크가 파열됐기 때문에 수술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하였다. 수술을 하면 고통은 대부분 없어질 거라 했다. 하는 수 없이 수술을 했다. 그런데 수술을 하고, 마취에서 깨어났는데 여전히 고통은 지속되었다. 단지 누워있으면 괜찮았는데 또 밤이 되면 누워 있지 조차 못했다. 병원에선 조금 더 기다려보면 눌려있던 신경이 다시 올라오면서 고통이 점점 줄어들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통은 지속되었다. 진통제를 계속 맞으며 버텼다. 병원에선 수술은 잘 됐다며 수술 영상을 보여주었다. 이건 수술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희귀한 경우라고 하였다. 보통은 파열된 디스크를 잘라내면 그동안 디스크에 눌려있던 신경이 서서히 살아나면서 괜찮아지는데 나의 경우 그게 아주 더딘 케이스라 방법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수술한 자리에 지속적으로 염증이 생기고 있는 상황이어서 염증을 제거하는 시술을 계속 받거나 재수술을 하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하였다. 나는 정말 죽고 싶었다. 하루아침에 장애를 얻은 기분이었다. 병원에서는 더 이상 방법이 없으니 퇴원하라고 하였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고통과 싸우며 집안에만 박혀 있었다. 이 고통을 없애주는 이가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한 한의사님을 만나 고통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정말 신기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지금도 약을 먹지 않으면 많이 걷지 못한다. 오른쪽 허리에서 허벅지, 종아리, 오른쪽 새끼발가락까지 고통이 남아있다. 그런 몸상태로 아이들과 산을 오르고, 걷고 또 걸으며 여행을 한 것이다. 나같이 남편 좋아하고, 남편 없이는 아무 것도 못했던, 외로움 많이 타는 여자가 남편을 버려두고, 아이들과만 어두운 산을 오르고, 비내리는 외진 시골길을 걷고, 모텔방에서 잠을 자는 일을 했다. 어떤 분들은 원래부터 혼자를 즐기고,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아니아니 나는 지금껏 여행이란 건 해본 적이 없고, 혼자 있는 것을 대단히 무서워하는, 결혼한 후로는 남편 없이 아이 데리고 식당도 못 나가는 그런 여자였다. 그런데 그 모든 삶의 틀을 깨부수고 거리로 나섰다. 육체의 고통도 깨부수고 싶었다. 그리고 어린이날 부모님의 손을 잡고 놀러가는 한 아이의 상상을 현실로 붙잡았다.
라캉이 말한 주이상스가 뭔지 느껴진다. 즐거움 뒤에 즐거움, 또 즐거움 뒤에 즐거움이 올 수는 없다. 즐거움 뒤에 즐거움은 느껴지지 않는 즐거움이니 말이다.
즐겁고 싶은가? 행복하고 싶은가? 본연의 나를 만나 진정 그러하고 싶은가? 기꺼이 고통과 마주하고, 무의식에 내재된 결핍과 마주하라! 당신의 마음속에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욕망의 불길을 사로잡아서 지금의 무언가를 깨부수어보라! 당신이 나와 같이 남편 없이 식당도 갈 수 없다면 그것을 깨 보아라! 당신이 나와 같이 질병의 고통으로 움직이기가 힘들다면 과감하게 산을 올라 보아라! 당신이 나와 같이 아이가 미워진다면 당신의 평화로운 일상에서 떠나 보아라!
나는 오늘도 욕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나의 아들이 쓴 글이다.
2018.1.16
“참다운 스승이란?”
‘교사는 하나의 생각만 자라나던 곳에서 두 생각이 자라게 하는 사람이다.’ 알버트 하버드는 말했다. 나는 이 말에 공감한다.
헬렌 켈러는 자신의 스승인 설리번 선생님 덕분에 장애인에서 장애인을 많이 도와주는 헬렌 켈러가 되었다. 만약 설리번 선생님이 없었다면 그냥 보통 장애인처럼 되었을 것이다. 나에게도 이런 선생님이 있다. 바로 우리 엄마이다. 왜냐하면 내가 어려워하는 것이나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 척척 다 알려준다. 어떤 선생님보다도 상세히 알려주고, 내가 아무리 난리를 쳐도 끝까지 봐준다. 마치 헬렌켈러가 설리번 선생님께 난리를 피우는 모습과 흡사하다. 나를 많이 혼내긴 하지만 그것은 모두 날 위해 하는 것이다.
부모님은 마치 프로메테우스 같다. 왜냐하면 엄마는 나를 행복하게 하려고 밤까지 학생을 가르치느라 아침마다 골골한다. 아빠는 명절에 과일을 많이 팔려고 엄청 노력하신다. 명절이 지나자 대상포진에 걸려 얼마동안 고생을 하시기도 했다. 나는 그런 부모님이 고맙다.
우리 학원의 형들은 엄마를 잘 따른다. 그래서 나도 학원에선 어깨가 으쓱하다. 형들은 가끔 “진짜 너희 집에 텔레비전 없어? 니네 엄마 게임 안 해?”하고 물어본다. 나는 당당히 “당연하지!”라고 말한다.
나는 아빠처럼 성실하고, 우리 엄마처럼 다른 사람한테 좋은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