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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주은 Mar 18. 2019

터널을 지나며

“어째서 다른 갈매기들처럼 되는 게 그리도 힘들단 말이냐, 존?”

 리처드 바크의 소설 『갈매기의 꿈』에서 생존이 아닌 자유를 갈망하는 아들 조나단에게 엄마 갈매기가 한 말이다. 다른 갈매기들처럼 산다는 것? 나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그처럼 어려운 말이 없다. 어쩌면 나는 이 책에 나오는 무리지어 생존에만 열중하여 사는, 조나단의 어머니가 말한 ‘다른 갈매기’처럼 철저히 살았다. 그러나 나는 조나단처럼도, ‘다른 갈매기’처럼 사는 것조차도 힘들고 버거웠다. 조나단의 꿈 같은 것은 멀고 먼, 달과 같은 이야기였다.

 스무살이 되었다. 나는 심지어 그 유명한 빵빵 학번이다. 내가 고3 때 Y2K로 인해  종말이 올 거라느니, 우리는 대학에 못 갈지도 모른다느니 하는 루머가 돌았다. 그러나 세상은 아무 일도 없듯이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무사히 변했고, 1년 만에 천 년이 지나, 우리는 빵빵 학번이란 소릴 들으며 말랑말랑한 새내기가 되었다. 그러나 나의 하루하루는 그때부터 고됨의 시작이었다. 나의 엄마는 안정적인 학과를 선택할 것을 권하셨다. IMF의 두려움을 아는 이 사회에서 안정적인 직업을 선택하는 것은 옳아 보였다. 아예 대학을 가지 말고 바로 공무원 시험을 치라는 선생님도 계셨다.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부득부득 우겨서 생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과를 갔다. 중학교 시절, 집안형편상 그토록 가고 싶었던 예고를 못가고 일반고를 간 것에 대한 반감 때문일까? 나는 소위 취업이 보장된다는 학과를 가지 않고, 문예창작과를 갔다. 집에서 다닐 수 없는 거리라서 나는 자취를 시작했다. 엄마는 반대의 표시로 자취방조차 얻어주지 않았다. 나는 엄마에게 결별을 선언했다.

 내가 중1이 되었을 때 엄마는 우유배달을 하며 정말 그날그날을 살아냈다. 미래 같은 건 없었다. 아빠가 남기고 간 어마어마한 빚은 죽어라 일하며 보낸 엄마의 30대를 다 잡아 먹었다. 마지막 남은 빚을 집을 팔아 다 갚고 나니 우리는 방 한 칸 없는 신세가 되어 작은 우유대리점 단칸방에서 세 들어 살았다. 내가 중‧고등학교 6년 동안 엄마는 크고 작은 교통사고와 여러 가지 자잘한 질병으로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다. 보험 하나 없는 형편에서 엄마의 잦은 입원은 어린 나를 좌절하게 했다. 우리는 점점 더, 가난에서 더 가난, 더 가난으로 하락했다. 엄마가 입원할 때마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우유 배달을 해야 했다. 혹시 일찍 등교하는 친구를 만날까봐 나는 더 이른 새벽에 일어나야 했다. 어쩌다 늦잠을 자고 만 아침에 제대로 씻지도 못한 얼굴로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우유배달을 하던 날, 같은 반 남자 아이와 눈이 딱 마주친 그때, 그 시간, 그 장소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나는 그 아이에게 입을 다물라는 의미로 초코우유 하나를 주었다. 그때부터 그 아이는 나만 보면 의미 섞인 웃음을 띄곤 했다. 그 비열한 웃음은 나의 꼿꼿했던 자존심을 하염없이 무너뜨렸다. 끊이지 않는 가난의 터널 속에서 나는 대학이란 사치스러운 또 하나의 관문으로 진입했다. 

 대학이란 곳은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내게 대학은 학문의 장소가 아니었다. 단지 이 시궁창 같은 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 같은 것이었다. 이 관문을 통과하여 다른 세계로 건너갈 수 있는 관문. 그러나 다른 친구들에겐 너무도 쉬운 그 일이 내게는 어찌 그리도 어려운 일이었는지. 늙은 시창작 교수는 책은 빌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라고 하였다. 일주일에 한 권의 시집을 사는 것이 과제였다. 너희들이 소주 한 병만 안 사 마셔도 살 수 있는 게 시집이라며. 맞는 말이다. 아이들은 하룻밤에도 수십 병의 소주를 죽자고 마셔댔다. 그러나 나는 그 돈이 없어서 소주조차도 마실 수 없었다. 술자리에 갈 시간도, 돈도 없었다. 시급 아르바이트를 새벽까지 몇 개를 해도 생활비와 책 값, 등록금을 충당하기가 힘들었다. 급기야는 휴학을 하였다. 나는 커피숍이나 레스토랑에서 서빙도 하고, 농장에서 경리 일도 보고, 건축사무소에서 문서 작업하는 알바도 했다. 그러다 그나마 시간 대비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과외와 학원 강사 알바를 구하면서 나는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학교로 다시 간 나는 새벽부터 일어나 영어 학원을 갔다. 더 좋은 학교로 편입하기 위해서였다. 학원이 끝나면 오전 7시였다. 학원 앞에서 김밥이나 라면을 먹고 학교로 가서 공부를 했다. 내가 공부하는 목적은 오직 장학금을 받는 것이었다. 장학금을 놓치는 순간 나는 두 배 이상의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학교가 끝나면 바로 과외 하는 아이의 집이나 학원으로 일을 하러 갔다. 저녁 먹을 시간도 없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집으로 오면 밤별이 지고 새벽별이 뜰 때가 많았다. 데이지를 되찾기 위해 불철주야 돈을 버는 개츠비의 마음이 그랬을까? 그토록 간절하고, 그토록 외로웠을까? 오늘의 현실은 아무 의미도 없이 오직 그날, 데이지를 만날 그 날만을 기다리며, 기대하며, 계획하며 오늘은 그냥 그렇듯 외로이, 죽도록 열심히 지나쳤을까?

 나의 이십대는 그랬다. 그런 하루하루의 중첩, 하루하루의 지독함 속에서 내게 작은 사치는 시험이 끝난 하루쯤은 하루 종일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오아시스’를 보던 가난한 여대생 세 명, 실컷 울고 영화관을 나서던 날, 친구 한 명이 제안하였다. 우리, 제주도 가자! 그랬던 그 아이. 나이 많은 아버지, 배 다른 오빠 세 명, 힘없는 엄마, 철저히 가족과 배제된 그녀의 삶, 쓸쓸하고 추웠던 그녀의 자취방……. 그래 가자. 우리는 2박 3일 동안 완벽히 현재만 생각하기로 했다. 미래 같은 거 말고, 내 통장의 잔고도 말고, 우리 딱 2박 3일의 사치를 즐겨 보자. 가난한 우리 3인방은 아무런 준비 없이 왕복 제주도 비행기 티켓 세 장만을 샀다. 최소한의 경비를 들고 말이다.

 공항버스를 타고 공항에 내리던 날, 우리는 처음으로 대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티켓 속 좌석 번호가 쓰인 숫자만 보아도 어찌나 가슴이 설레든지, 혹시나 탑승 절차를 잘 몰라 망신이나 당하지 않을까 우려 반 설렘 반으로 우리는 비행기에 올랐다. 단정한 머리와 깔끔한 제복을 입은 스튜어디스의 인사를 받으며 우리는 수런수런 뭐라고 수다도 한참 떨었다. 텔레비전에서 보던 만큼은 안 예쁜 거 아니냐며, 좀 다른 부분이 있다며 그런 얘기를 했을지도. 그러나 사실 너무 긴장하여 그날 스튜어디스의 하얀 얼굴 말고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 그 언니가 참 부러웠던 것도 같다. 그렇게 우리는 드디어 비행기에 착석했다. 기내 방송이 울려 퍼지고, 스튜어디스들이 멋지게 비상시 대피 요령을 알려주는 그 시간도 얼마나 좋아서 열심히 들었는지, 비행기가 서서히 움직이는 그 순간에 온 몸의 세포가 나 살아있다며 일어서는 듯한 생생함, 창공으로 한 순간에 올라서는 비행기의 엄청난 속력이 주는 매력, 구름을 뚫고 지나갈 때의 작은 물방울들의 집합체가 들려주는 진동, 그 하나하나에 심장이 터질 듯 즐거워하는 우리 셋. 지금 생각하면 웃음 나는 순박함이었다.

 짧은 비행이 끝나고 우리는 제주도에 도착했다. 8월의 태양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 뜨거움 속에서 우리는 작은 가방 하나 울러 매고 제주의 지도를 펼쳐놓았다. 그냥 한 바퀴 돌자고 생각했다. 목적지도 없었고, 반드시 해야 할 것도 없었다. 단지 우리는 태어나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부모님을 떠나 친구들하고만 온 자유 여행, 그 자체로 행복했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아름다운 바다가 보이자 우리는 내렸다. 작은 민박 하나를 잡아 놓고 짐을 풀고는 바다로 뛰어갔다. 여름이지만 휴가철이 다 지난 늦여름이라 사람은 별로 없었다. 게다가 그 바닷가는 유명한 바닷가도 아니어서 타지 사람은 우리가 유일한 듯하였다. 우리는 맘껏 뛰어다니고, 맘껏 소리 질렀다. 관찰자 시점에서 누군가 우리를 보았다면 아마도 시련이라도 당한 여자들 같았겠지. 그러다 풀썩 모래사장에 앉아서 30개의 발가락을 모아놓고 사진을 찍었다. 키득키득, 깔깔깔 즐거운 발가락들, 한없이 자유로운 발가락을 간지럽히는 제주 바다의 모래알갤이들, 그 감촉, 그 자유로움이 지금은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서 나의 앨범 속에 흑백으로 숨었다. 

 성산의 미친 듯한 파도, 시원하고 짭짤한 바람은 한 순간 지나갔다. 마지막날은 비가 많이 내렸다. 그래서 우도를 가지 못하고 우리는 공항 인근을 돌아다니다 공항으로 와야만 했다. 아쉬운 2박 3일이었다. 공항에서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보았다. 어두컴컴한 하늘, 낯선 장소, 탑승을 기다리고 있는 비를 맞으며 서 있는 비행기들. 슬펐다. 우리는 모두 축 늘어졌다. 그처럼 슬픈 귀가가 있었을까! 다시 비행기를 타고, 버스를 타고, 각자의 자취방으로 돌아가 또 하루하루를 세상 속에서 살아갈 일을 생각하니 2박 3일의 시간이 꿈처럼 느껴졌다. 돈이 없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한 3일이었다. 가난한 그 3일의 여행이 끝나고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또 미친 듯이 열심히 먹이를 찾는 갈매기떼처럼 무리지어 살아냈다. 조나단의 꿈같은 것 없다, 생각하며 그냥 살았다. 그렇게 사는 것조차도 버거운 나날들이어서 그렇게라도 살아야했다. 그 하루하루의 시간 속에서 우리의 작은 사진들은 힘이 되었고, 그 짧은 비행은 긴 터널을 무사히 지나오게 하는 버팀목 같은 것이었다. 

 지나와 생각해보니 우리는 한 마리, 한 마리 다 조나단이었다. 우리의 그 처절한 비행은 사실은 꿈을 향한 비행이었다. 그냥 그렇게 먹고만 살 수는 없었기에, 그렇게는 살 수 없었기에 치열히 날고 또 날았다. 죽을 것 같아도 또 날고, 죽을 걸 알면서도 도 날았다. 비행이 성공할 때까지 날고 또 날았다. 더 높이 날고 싶었다. 단순히 먹이만 구하는 비행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에 나는 이 무리 속에도, 저 무리 속에도 들지 못하는 왕따의 삶을 스스로 자처했다. 술 마시고, 미팅하고, 동아리 활동하는 대학 생활과 스스로 결별하고 철저히 홀로 섰다. 

 그렇게 나의 이십대는 지나갔다. 나는 취직을 했고,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결혼 십 주년을 맞아 남편이 제주도 티켓을 끊어 주었다. 나의 과거사를 다 아는 친구 같은 남편의 배려였다. 이번엔 2박 3일이 아닌 일주일이었다. 제주도 구석구석을 다 가보자며 나의 기준에 꽤 긴 일정을 제주도 한 곳에 잡았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 보는 아이들. 모든 것이 신기한 아이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나는 그 아이들이 한 없이 예쁘고, 한 없이 부러웠다. 이 아이들의 나이는 고작 열 살, 다섯 살이니 말이다. 이 아이들이 이토록 어린 나이에, 쉽게 가는 여행을 나는 그토록 힘겹게 이십대 통틀어 딱 한 번 간 것이었다. 비행기가 움직이자 아이들이 긴장했다. 작은 녀석은 창으로 아래를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저 아래 장난감 차랑, 집이 엄청 많아요. 저긴 장난감 동네인가 봐요.” 

 “장남감이 아니라 진짜 차랑, 진짜 집이야.”

 “정말요? 그렇게 빨리 우리가 하늘로 올라왔단 말이에요?”

 그것도 잠시, 우리는 숱한 물알갱이를 뚫고 구름 위로 올라섰다. 구름 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엄마, 왜 이젠 아무 것도 안 보여요?”

 “우리가 구름 위로 올라왔기 때문이야.”

 “그럼 비행기는 물로 다 젖었겠네요? 구름이 물방울이잖아요.”

 아이의 질문은 끊임없이 쏟아졌다. 평소보다 좀 더 상기된 얼굴, 목소리. 쫑알쫑알 아이들의 질문 속에서 스물 두 살, 우리 셋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마음은 촉촉이 젖었다. 

 지금은 다들 아이 엄마가 된 친구들. 각자의 일터에서, 가정에서 여전히 충실히 살아가고 있다. 여전히 우리는 그닥 곤궁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30대를 살아가고 있고 곧 40대의 알 수 없는 시간을 살아갈 테지. 이제는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스물 두 살 그때의 가슴 떨리는 비행은 못할 것이다. 

 인생이란 긴 비행 속에서 때로는 구름을 뚫어내느라 작은 진동을 느끼기도 하고, 압력을 견디지 못해 귀가 먹먹하기도 하겠지. 폭풍우를 만나 잠시 흔들리기도 하고, 급격한 하강과 상승 속에서 정신이 없기도 하겠지. 그러나 인생은 살아볼 만 한 것. 우리가 그토록 많은 실패를 경험한 것은 많은 도전을 했기 때문이고, 우리가 그토록 많은 이별을 한 것은 많은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말처럼 나의 이십대, 그 짧은 비행은 긴 터널 속에서 빠져나와 인생이 살아볼 만하다는, 어쩌면 인생은 아주아주 재밌는 비행일 수도 있음을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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