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을 읽은 밤
“죽음을 기억하라! memento mori!”
죽음을 생각하면 다 시든 국화잎을 보듯 바삭거린다. 아무 것도 없고, 아무 것도 아니고, 물기 없는 그 바삭거림. 그래서 슬프고, 직면하고 싶지 않은, 피하고만 싶은 무엇이다. 그러나 의아한 말일지 모르지만 한걸음 뒤에서 바라보면 죽음은 우리를 향해 힘을 내어 살라 한다.
인간은 유한하다. 어떤 인간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유한성은 오늘의 소중함을 알게 하고, 현재의 가능성을 자극한다. 인간이 천년만년 산다면 오늘의 소중함을 알겠는가! 생의 위대한 도전을 이룩하겠는가!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그래서 슬픈 존재이다. 그러나 그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오늘 하루, 또 하루를 살 수 있지 않을까! 영원히 산다면 우리는 무엇도 해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영원히 사니까, 나중에 하면 되니까. 인간의 짧은 생명 속에서 우리는 우리 본연의 삶을 살아내야 하고, 사랑도 해야 하고, 아이도 낳아야 하고, 나를 찾아 키워내기도 해야 한다. 그래서 바쁘고, 그렇기에 무엇이든 할 수도 있다. 죽음은 아주아주 먼 이야기가 아닌, 언제나 우리와 붙어서, 그 어느 때나 우리에게 올 수 있음을 기억하며, 그 죽음과 직면할 때 우리는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존재한다’가 아닌 ‘존재했었다’의 아름다움에 더 무게를 둔다면 우리가 짓눌린 이 죽음을 좀 더 가벼이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향도 그치고, 색도 바랜 국화잎을 더욱 바짝 햇살에 말려본다. 국화잎은 그렇게 한시절 아름다움을 뒤로하고 말라간다. 현재는 과거가 되고, 그렇듯 과거에 갇힌 듯 보인다. 그러나 그 국화잎을 찬 겨울 따스한 찻잔에서 우려내면 그윽한 향과 맛이 파릇하게, 땅 위에서 뽐내던 시절보다 더 고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 존재가 죽어 없어져도 그의 발자취는 영원히 남는다. 죽음을 좀 더 가벼이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생은 축복이 되지 않겠는가!
가을이 왔다. 저녁 무렵 귀뚜라미가 가을을 알려준다. 귀뚜라미 한 마리가 창밖으로 넘어 들어왔다. 살포시 잡아 밖으로 내보니 또 들어온다. 잡아서 내보내니 또 들어온다. 귀뚜라미조차 ‘안’의 따스함을 아는가! 매미 소리 그치고 밤마다 귀뚜라미 소리 아련한데 한낮은 여전히 땀이 난다. 올해는 유난히도 더운 여름이었다. 잠시도 에어컨을 끌 수가 없었다. 밖은 40도가 넘는 무더위가 지속되는데 내 사무실은 언제나 적정 온도를 유지해야 하므로 에어컨을 끌 수가 없다. 안에선 냉방병이 걸리고, 밖에선 폭염에 사망 환자가 생긴다. 그 온도차를 견뎌내기 위해 애쓰기라도 하듯 유리창엔 작은 물방울들이 맺힌다. 나는 모든 창밖에 미안해진다.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저기가 아닌 이곳에 있음을. 그러나 이 책에서 만난 여러 상처들을 바라보며 심장의 울컥거림을 참아내기 힘들었던 것은 내 생애 어느 순간, 어디 즈음에 나도 저기 어디쯤 밖에 있어서였을까? 김수영 시인의 <풀>이라는 시를 처음 보고 그토록 울었던 과거의 나는, 어쩌면 현재의 나도, 어느 측면에선 여전히 풀이고, 세상에서 찬밥인 이들과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은 별 것이 아니라는 비튜겐슈타인의 말이, 모든 불안과 몰락에 직면하라는 하이데거의 말이, 인간은 원래 아무 것도 없는 無였기 때문에 자유롭다는 사르트르의 말이 죽음의 한 가운데에 있는, 절벽의 끝자락에 있는 눈보라 속 그들에겐 먼 기차의 허공을 두드리는 기적소리쯤으로 들리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때로 우리는 남의 비극으로 나의 삶을 위로받기도 하는 그런 연약한 존재이니 말이다. 책 속 많은 비극을 만날 때마다, 책 속에서 낮은 자들의 신음 소리를 들을 때마다, 대충 흘려보내던 나의 일상이, 지겹기 짝이 없던 나의 일상이 기적이고 사건임을 알게 된다. 그러니 비극은 희극보다 우리의 상처를 치료한다는 말은 정녕 사실인 듯하다. 허망하게 아들을 먼저 보낸 영우 엄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보험금으로 또 살아내야 하는, 모든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하여도 또 살아내고, 살아내야만 하는 낮은 자의 삶도 있고, 죽는 게 사는 것 보다 나은 선택임을 아는 에반도 있고, 엄마의 품을 개에게서 느껴야만 했던 노찬성도 있다. 연민도, 경멸도, 호기심도 없는 얼굴로 이런저런 쓸 데 없는 말이라도 늘어놔주기를 바라는 철저한 고독에 갇힌 자들도 있고, ‘고개라도 한번 돌려주지’, ‘고개라도 한번 돌려주지’ 그 마지막을 보지 못해 안타까이 살아가야만 하는 이도 있고, 악착같이 세상에 빌붙어 살아보려다 결국 마이너리그로 밀려난 한 강사도 있다.
세상은 그토록 많은 풀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 강인한 생명력을……. 어릴 적 나는 엄청난 농사일을 해내야만 했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아버지의 결핍. 무남독녀로 온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 하던 내게 그 결핍은 참으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아비 없이 엄마와 단 둘이 엄청난 양의 농사를 지어야만 했다. 아버지가 떠나시며 남긴 엄청난 빚으로 엄마와 나는 쉴 틈 없이 일하면서 그 빚을 갚아내고 갚아내도 동네 사람들은 밤마다 우리집 마당에 들어 누워 울어대곤 했다. 그들도 안 됐고, 그 원망을 그저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나의 젊은 엄마도 안 됐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엄마와 함께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들을 했다. 특히 힘들었던 것은 풀을 뽑는 것이었다. 논에는 어찌 그리도 많은 풀이 나는지. 뽑아도 뽑아도 다음날이면 또 자란 풀의 생명력이 얼마나 강한지. 그렇게 많이 뽑아대도 추수 때면 여전히 벼들 사이에 숨어있는 풀, 풀, 풀. 그래서 한 시인이 풀을 이렇게 노래했을까!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물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이 세상 많은 풀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대들은 풀이기에 강인하다고. 그러니 두려워말고 이 생을 끝까지 잘 살아내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