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쩌다 세상에 왔을까?
당연히 기억은 없다. 추측만 할 뿐.
우리는 그때의 기억이 좋든 나쁘든 간에 기억을 하지 못한다.
좋은 기억이면 좋은 기억대로 슬플 것 같고,
나쁜 기억이면 나쁜 기억대로 슬플 것 같다.
오로지 엄마의 살뜰한 챙김에 의지해야만 하는 시기.
나를 위해 엄마의 희생만이 강요됐던 때.
세탁기도 없었고, 얼음장같이 시린 물에 손이 곱아질 듯 아려도 천 기저귀를 빨아가며 나를 키우느라 정신없었던 젊었던 엄마.
아빠와의 진창 같은 삶으로 깊숙이 들어가기 전이었기 때문에 참을 수 있었던 걸까?
나의 작은 육아수첩 빈 공간에 깨알같은 글씨로 고개를 가눈 것, 뒤집은 날 등을 기록하며 아이가 커가는 기쁨을 조금씩이나마 누리신 것 같다.
밤마다 온 동네가 떠나가라고 울어댄 나 때문에 아빠는 담장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다고 했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빛바랜 사진 속에서 날 업고, 안고, 잡고 있는 엄마는 거짓말처럼 찌들었거나 힘든 표정을 찾아볼 수가 없다.
활짝 웃고만 있는 모습이 힘든 현실을 거짓으로 느껴지게 할 만큼 천진난만하기만 하다.
그렇지.
엄마는 원래 밝고, 천진난만하고, 말괄량이 같은 사람이지.
단지 엄마를 둘러싼 모든 사람과 환경이 엄마를 성격대로 살지 못하게 만들었을 뿐.
원래는 밝고 맑은 사람이다.
영도에서 물장사를 했던 외할머니 덕에 늘 현금이 방에 데구루루 굴러다니던 집에서 자란 소녀가 찌든 가난으로 몸부림칠 줄 몰랐겠지.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신부였다면 젊다는 힘으로 이겨내기가 쉬웠을까.
그 시절 괜찮은 남자들을 몇몇 소개받을 뻔했으면서도 고르고 고른 사람이 결국 썩은 동아줄에 매달린 남자.
스물아홉, 지금 시대로 보면 마흔도 훌쩍 넘어서 결혼한 것과 다름없는 늦은 나이에 고행의 길로 접어들었다.
늘 사글세를 전전하며 살았다.
당시 50만 원이면 집을 산다고 했을 정도로 별 볼일 없던 동네에서조차 주인집에 딸린 작은 방들에서 살았다.
바보같이 가진 돈 800만 원으로 집이나 샀으면 고생을 안 했을 건데, 그 돈을 아빠와 고모들의 꼬임에 보로꼬 공장으로 불렸던 벽돌 공장을 차리는 곳에 모두 돈을 넘겼다.
그리고 그 큰돈을 모두 투자하고 망하는 데는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엄마는 너무 순진하고 바보 같았다.
냉정한 척 하지만 가까운 사람에게 강하고 억세게 하지 못해서 항상 당하기만 했다.
결국 바람 잘 날 없이 휘청거리는 삶이 너무 힘들어서 2년여 만에 이혼을 요청했다.
친할머니께 이 사람하고는 도저히 못살겠어서 이혼하고 싶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당연히 반대했고, 반대보다 더 이혼할 수 없는 이유인 동생이 뱃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로써 엄마는 본격적으로 아빠와의 진창 같은 삶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물론 나와 동생 역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