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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진 Sep 07. 2021

쌀가마니와 테레비

나는 어쩌다 이 세상에 왔을까?


먹고는 살아야지.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전재산과 다름없는 돈을 보로꼬 공장 차리는데 투자한 엄마의 마음과는 달리, 아빠와 고모들은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

동네 3층집 주인에게 물어본 집값이 700만 원이라는 소리에 가슴이 꽉 막혔다.

이 돈이면 3층집을 살 수 있었는데….

세를 주고 월세 받으며 애 둘 정도는 편하게 키울 수 있는 돈이었는데….

자신의 어리석음이 철저히 후회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 큰돈이 들어갔는데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공장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엄마는, 동생을 임신한 몸으로 망해가는 공장을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직접 벽돌을 나르며 일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결국 아무 소득도 없이 공장은 망했고, 동생은 태어났다.

3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조금도 나아짐이 없이 여전히 배를 곯았다.

나를 낳고는 수제비로 끼니를 났는데, 동생을 낳고는 컵라면으로 끼니를 났다.

나오지 않는 젖이라도 쥐어짜려면 굶을 수는 없었으니까.

아빠는 그 와중에도 자식을 낳은 엄마를 뒷전으로 하고 외박까지 하고 다녔다.

혼자 너무 외롭고 가혹하게 삶과 싸웠다.


동생을 낳아도 달라지기는커녕 더욱 수렁으로 들어가는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서울에서 이모가 부산 촌구석에 있는 우리 집으로 찾아오셨다.

서울 이모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말문이 턱 막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셨다.

쌀 한 톨 없는 쌀통,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밥, 반찬….

겨우 발견된 것이라고는 작은 컵라면 몇 개가 전부.

젖먹이 갓난쟁이를 키우는 집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초라한 부엌.


“네가 여기서 왜 이러고 사니.”

속이 상한 이모는 그 길로 돌아나가셨다.

그리고는 곧장 쌀 한 가마니를 사시고는 들어가면 나올 때 빈차로 나와야 한다는 둥, 포장도 안된 도로라는 둥 택시기사의 불만에 택시비 2배를 주기로 하고 우리 집으로 큰 쌀가마니를 가지고 오셨다.

마치 산타할아버지처럼…….

이모는 앉아서 얘기할 자리도 없는 단칸방 허름한 세간살이에 마음만 시커멓게 탄 채, 갓난아이와 어린아이를 옆에 둔 엄마를 뒤로 하고 서울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셨다.




속이 상하면 뭐하고, 썩으면 뭐하랴.

당장 눈앞에 닥쳐있는 현실이 지옥 속이라도 살아내야 하는 것이 인생인데….

엄마는 아이를 밴 몸으로 벽돌을 나르며 일을 했던 후유증과 몸조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허리디스크까지 얻었다.

디스크로 인한 통증이 너무 심하다 보니 동생은 업어줄 수도 없었다.

진통제로 하루하루를 견디면서 매일을 울면서 지냈다. (그 후로도 5년씩이나…)

그러던 어느 날 주인집으로부터 전화받으라는 연락을 받고 엄마는 부리나케 뛰어갔다.

아빠가 오토바이에 받쳐 사고가 났다는 소식.

청천벽력이었다.

당장 굶어 죽을 상황에 아빠의 오토바이 사고소식이라니.

일자리 알아보러 나갔다가 나팔바지가 지나가던 오토바이에 휩쓸려 다리가 골절됐다고 했다.

집에 쌀 한 톨이 없는 와중에도 술은 무슨 돈으로 사 먹은 건지 술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그랬다고 한다.

급하게 병원으로 달려갔던 엄마에게 아빠는 겨우 한다는 소리가 병원에 테레비가 없어서 지루하고 심심하다고 했다.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엄마는 등에 동생을 업고, 한 손은 나를 잡고, 테레비를 머리에 이고 택시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마을 어귀까지 가서 힘겹게 택시를 잡아타고, 끙끙대며 테레비를 트렁크에 싣고 아이를 챙겨가며 도착했다.

그렇지만 그 무거운 테레비를 머리에 이고, 아이를 지고 도착했던 엄마에게 돌아온 것은 모멸감이었다.


겨우 4살이었던 내 기억에도 그날의 병실 풍경은 어렴풋이 기억난다.

천정에서 내려온 지지대에 다리를 얹고 누워있던 아빠의 모습.

뭐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며 화를 그렇게도 냈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다.

엄마가 마음을 긁는 말을 던졌는지 어쩐 건지 모르겠지만, 갓난아이를 업고, 어린아이를 한 손에 붙들고, 테레비를 머리에 이고 힘들게 병실로 찾아온 아내에게 베개를 던진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었다.

아빠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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