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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진 Oct 08. 2021

희망으로 빛났던 아파트

중학생

반지하 월세살이로 나의 국민학교 시절을 보내고 중학생 신분으로 탈바꿈하던 그 무렵.

중학교에 입학 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던 시기에 우리 집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엄마가 모은 돈을 발판으로 모자란 금액은 큰 이모 댁의 도움으로 융자를 받고, 전세로 이사를 가는 큰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다.

엄마는 큰 일을 앞두고 아빠를 독려해가면서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자며, 1년에 1~2번 있는 귀한 돼지갈비 외식으로 가족끼리 힘내자며 파이팅을 했다.

그때 우리 가족은 모두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드디어 반지하 집에서 나와서 번듯한 아파트로 이사를 갈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비록 전세지만 18평 아파트로 방도 무려 3칸이나 되고, 주방이 존재하며, 실내에 화장실이 있었으니 더할 나위가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짜리 아파트라 사용할 수 있는 공간도 꽤 넓었다.

베란다도 양쪽으로 2개를 온전하게 사용 가능했으니까.

무엇보다 우리와 함께 비좁은 방에 불편하게 지내셔야 했던 외할머니의 방이 따로 생겼다는 것이 가장 놀라운 일이었다.

나와 동생도 기쁜 마음을 말로 다할 수 없었지만 아마도 그 당시엔 엄마가 제일 행복했을 것 같다.

늘 마음이 쓰였을 외할머니께서 편히 쉬고 잠잘 공간이 확보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엄마가 마음 편히 주무실 수 있지 않았을까?




이사 간 곳에서는 학교까지 버스로 15분 정도면 갈 수 있었다.

학교에서 이렇게 가깝게 살아본 것이 처음이라 어색하기도 했다.

그때쯤 지하철 공사를 시작했었던 것 같은데 공사 때문에 순수하게 버스로 10분이면 갈 거리를 40분이나 걸려서 도착하는 바람에 지각으로 벌도 서봤지만 그냥 그곳에 살아서 너무 행복했다.

여전히 동생과 내가 한 방을 쓰지만 책상을 나란히 두고도 둘이 어깨가 부딪히지 않을 만큼 널찍하게 있을 수 있었고, 라디오를 듣기도 하고, 학습지라는 것을 하면서 계급이 바뀐 듯한 기분을 느끼며 공부를 했다.

동생과 나는 학년으로 4학년이 차이가 났기 때문에 같은 학교를 다닐 수는 없었지만 각자의 친구들과 추억을 쌓아갔다.

하지만 집에서라도 둘의 공통적인 추억 쌓기가 생겼으니 당시 방영했던 베르사유의 장미.

그 애니메이션을 보기 위해 학교를 마치면 칼 같이 집으로 왔던 기억이 난다.

그때 겨우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동생이 프랑스 혁명을 다룬 만화를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디즈니에서 나온 인어공주와 함께 만화에 관심이 많았던 동생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애니메이션 중 하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사 온 후로 우리의 한결 나아진 살림살이를 보기 위해 서울에서 이모께서 집에 놀러 오기도 했고, 작은 외삼촌도 찾아와서 동생네의 형편을 보고 가기도 했다.

갑자기 살기 좋아져서 어색하고 얼떨떨한 여름, 가을을 보내고 부산에선 보기 힘들었던 새하얀 눈이 내린 겨울에 뒷산에 올라 가족이 모두 사진을 찍으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 해 겨울을 강타한 미스터투의 하얀 겨울이라는 노래가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올 때마다 우리들의 마음에도 새하얗게 눈이 내리며 그 간의 힘든 일들이 하얗게 덮이는 기분을 느꼈다.

이제는 힘들고 절망적인 시간은 오지 않을 것이라는 부푼 희망과 믿음으로 각자의 마음에 희망을 꽃피우며 행복감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 아파트는 독이 든 잔이었던가.

엄마 몰래 조용히 어딘가에서 돈을 빌린 아빠의 채무 독촉장을 받으면서 잠깐의 행복감은 곧 불안함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아빠는 출처를 모를 채무들과 성실하지 않은 택시 일로 엄마의 마음을 옥죄어대고 있었다.

택시 일이 나태하게 된 대에는 엄마의 나쁜 영향도 탓이 있었다.

부슬비가 아주 조금이라도 내리면 부슬비가 내려서 사고 날 것 같다는 핑계로 일을 그만두고 집으로 오고, 피곤하면 피곤해서, 감기가 있으면 감기가 있어서, 낮에는 돈이 안된다는 이유로, 밤에는 야간이라는 이유로 종종 일을 하다 말고 집으로 돌아오는 습관이 점점 커져만 갔다.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엄마가 받아줬기 때문에.

그리고 그걸 받아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단 하나.

개인택시.

무사고 경력 기간이 10년 가까이 유지되어야 하기에 저런 말도 안 되는 핑계지만 혹시라도 만에 하나 접촉사고라도 나게 된다면 지금까지의 시간은 모두 물거품이 될 수 있어서 엄마는 무조건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 아주 작은 접촉사고로 인해 몇 년의 경력이 날아간 경험이 있기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힘들어도 몇 년만 고생하면 개인택시를 바라볼 수 있다는 가장 큰 목표가 있었으니까.

개인택시는 엄연히 개인사업자이기도 하고 회사에 소속된 영업택시에 비해 사납금을 낼 필요가 없으니까 벌이가 비할 바가 아니었다.

개인택시만 받으면 진짜 우리 집도 사고, 앞으로 살아가는 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공동의 목표를 위해 조금의 희생쯤은 참아내야 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가족 전체의 미래를 그리는 엄마의 간절한 꿈을 아빠는 볼모로 삼고 이용하기 일쑤였다.

잠깐의 안정과 행복도 참지 못하고 일은 제대로 하지 않고, 상의 없이 빚을 내면서 엄마가 키우는 희망의 나무에 조금씩 독약을 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희망에 부풀었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아빠의 전세금 탕진으로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렇게 엄마의 살아갈 이유였던 단 한줄기 희망의 빛이 차단되어 버렸고, 우리는 함께 짙은 어둠 속으로 갇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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