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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진 Oct 05. 2021

무시당한 동행길

엄마의 엄마, 외할머니

외할머니의 마음을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던 그날의 기억.


국민학교 5, 6학년 때쯤 됐던가.

그날이 방학이었기 때문인지, 학교를 가지 않는 날이어서인지 나는 집에 있었다.

부모님은 일 때문에 집에 안 계신 건지 어쩐 건지까지는 기억이 안 난다.

나는 일을 나간 엄마 대신 할머니의 인솔자가 되었다.

그땐 어르신들께 교통비를 돈으로 지급하지 않고 승차권으로 지급했었다.

살고 있는 동네의 동사무소에서 받아가면 되는 거였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우리 집에서 살고 계신 외할머니 승차권을 돌아가신 큰 외삼촌네 동사무소(현. 행정복지센터)로 찾아가야 받을 수 있었다.

전입신고도 되어있었던 것 같은데 호적 상에 뭔가 처리가 안됐었겠지.

어쨌거나 그 덕에 나는 허리가 굽어 조심스러운 외할머니와 함께 가보지도 않은 제법 먼 동네까지 버스를 타고 50분가량을 가야 했다.

치렁치렁한 긴 한복을 입으신 외할머니는 불안한 걸음걸음으로 버스에 올라탔지만, 다행히 자리를 양보해주신 분들 덕분에 외할머니는 난폭 운전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다.

나는 외할머니 앞에 잘 서있다가 갑자기 사람들이 너무 많이 올라타서 밀리고 밀려 안쪽까지 들어가게 되었는데 도착지에서 내릴 걱정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꽉 들어찬 버스 안에서 힘싸움을 해야 비집고 나갈 수 있었는데, 만약을 대비해서 내릴 정류장 한 정거장 앞에서 미리 일어났다.


'삐-'


부저를 얼른 누르고 외할머니께 다가가는데 갑자기 외할머니가 버스가 떠나가라 내 이름을 부르시는 것이 아닌가.


"아무개야~, 아무개야~."


내릴 곳을 지나칠까 걱정된 외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내리시려고 있는 힘껏 이름을 부르신 거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한창 예민한 나이인 나에게는 그 순간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또 큰 소리로 부르실까 봐 얼른 외할머니가 있는 자리로 비집고 다가가서 안 넘어지시도록 한 팔로 보듬고 조심히 내렸다.


휴...


우리는 한숨과 함께 무사히 정거정에 내릴 수 있었다.




반지하 셋방살이하던 우리 집과는 다르게 큰외숙모네는 당시 좋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이전에 어떤 일로 가본 적이 있었는데 이종사촌 언니의 방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커다란 오르골들이 몇 개나 있었다.

향긋한 방에 침대도 있고, 피아노까지 있었던 그 집에서 아름다운 오르골 소리를 들으며 같이 놀았던 기억을 내내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좋았던 곳을 다시 와볼 수 있다는 것에 살짝 설레기까지 했다.


"띵동-"


미리 간다고 약속을 다 하고 출발했기 때문에 큰 외숙모는 우릴 알아보시고는 나왔다.

이미 남편을 사별한 지 오래인데 이런 사소한 것으로도 방문하는 시어머니와 올케의 자식이 마냥 반가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건 외할머니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들은 이 세상에 없는데 보고 싶지 않은 큰며느리 네로 찾아와야 했으니...

내가 뭘 알까.

나는 그저 외할머니를 이곳까지 무사히 모셔와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후 집으로 무사 귀가만 하면 되는 심부름꾼이었을 뿐.

큰 외숙모와 동사무소로 가서 승차권만 받아오면 되는 간단한 임무를 마치면 바로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인해 당일에 승차권을 받지 못했고, 연로한 외할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갔다가 다시 오기에는 너무 위험부담이 컸다.

하는 수 없이 그날은 큰 외숙모 집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큰 외숙모네 아파트야 우리 집에 비하면 대궐처럼 넓었다.

그러나 외할머니와 내가 하루 자고 갈 방은 없었기 때문에 거실 한편에서 잠을 청하기로 했다.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고, 이불도 없이 거실 한편에 누워 자려는데 어린 나도 나지만 외할머니를 이불도 없이 자라고 하는 큰 외숙모가 원망스러웠다.

겨우 하루인데.

세탁기도 있으면서...

우리 집처럼 이불 빨래를 손으로 해야 하는 것도 아니면서...

내가 덮을 이불은 안 줘도 여든이 훨씬 넘은 외할머니의 이불은 좀 주시지.

화가 났다.

하지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그곳은 우리가 와서는 안 되는, 우리를 결코 반기지 않는 그들만의 영역인데 우리가 침범한 것이었으니까.

다음 날 아침 일찍 동사무소에서 승차권을 수령하고는 곧바로 그곳을 떠났다.

나는 외할머니와 같이 묶여 상처를 받았다.

모든 것이 기억나지 않지만 불쑥불쑥 내뱉던 말들, 냉랭한 분위기, 쌀쌀한 날씨에 거실 한 귀퉁이 덩그러니 맨 몸으로 자야 했던 기억, 간단한 요기로 끼니도 해결하지 못한 배고픔 등등.


후에 엄마가 이 사실을 알고는 많이 분개했었다.

큰외삼촌 재산, 외할머니 재산 모두 차지하게 되었으면 양심적으로 따뜻한 밥 한 끼 내어주는 게 그렇게 어려웠냐고 인간 같지도 않다고 화냈었다.

큰외삼촌이 병세가 많이 깊은 상태로 고통을 겪을 때도 병간호는커녕 노름에 술에 바람까지 피웠던 사람이라 별 것 아닌 것에도 우리들의 미움은 가실 줄을 몰랐다.


어쩔 수 없어요, 엄마.
어차피 얼굴 볼 사이도 아니니까 잊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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