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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진 Oct 01. 2021

외할머니의 아지트

엄마의 엄마, 외할머니

날이 밝으면 외할머니는 숱은 아주 적었지만 길었던 머리칼을 참빗으로 곱게 빗어내린다.

가운데 가르마를 중심으로 한올도 벗어나는 것이 없도록 단단히 빗어내리고는 목덜미 바로 위에서 돌돌 감아 세월이 잔뜩 묻은 은색 비녀로 찔러 고정을 시킨다.

겹겹이 옷은 입지만 흐트러짐 없이 정리해서 새색시처럼 말간 얼굴에 어울리는 단정한 차림새이다.

조용히 주섬주섬 나설 채비를 하시고는, 구부러진 허리를 지팡이에 의지하고, 깨끗한 흰 양말에 새하얀 고무신을 신곤 조심조심 길을 나선다.

또각또각 지팡이 소리가 일정 간격으로 들릴 뿐 고무신을 신은 하얀 발은 소리도 없이 지나간다.


딱, 딱, 딱, 딱


외할머니는 당신이 매일 신으셨던 그 새하얀 고무신 같던 분이셨다.

오래 신어도 발바닥 상표만 지워질 뿐, 흠집 하나 없이 새하얗게 깨끗하게 닦아 너무나 가지런하게 한쪽에 고이 벗어두셨다.

우리들 신발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도 외할머니가 고무신을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것은 본 적도 없다.

아흔셋에 돌아가실 때까지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신 적 없이 대쪽 같은 선비 같았다.

누구와 언쟁을 벌이거나, 소동을 일으키거나, 조심성 없는 행동을 하거나, 술을 드신다거나 그런 일은 외할머니의 사전에는 없었다.

시대가 그래서 삶이 그랬을 뿐, 상황이 허락됐다면, 지금 태어나셨더라면 예상컨대 공부도 많이 해서 교수가 되셨거나, 공무원이 됐거나,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법조인이 됐을 것 같다.


하지만 밖으로 표출하지 않는 성품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면 내 등 뒤에서 할머니의 구슬픈 신세타령이 들려오는데 그 속에는 원망 섞인 내용, 자신을 자학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즐거워서 노래하시는 건 사실 기억에 없다.


"아이고, 니만 잘 되구로 하면, 밑에 동생들도 잘 되겠거니 했는데...."

"니 하나 믿고 뒷바라지 했구만은 이렇게 내를 버리고..."

"좋도 안 한 인생... 살아도 좋은 것도 없구만은 기나긴 목숨은 버리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해 살꼬... 언제 죽노..언제 죽노..."


주로 이런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하루 이틀.

조용히 계시다가도 속에서 울화가 올라오면 어김없이 가슴속 슬픈 한을 구슬프게 토해내셨는데 그게 자라나는 우리에게 듣기 좋을 리가 있나.

그래서 할머니는 저 아지트로 가신 건지도 모른다.


아지트는 허술했다.
그렇지만 그만 가시라고 할 수는 없었다.
가슴에 맺힌 한을 조금이라도 풀 공간은 필요했으니까.


그 시절 많은 부모들이 그랬듯이 장남 하나만 제대로 키워내면 동생들은 장남이 알아서 거두겠지 했다.

그건 외할머니도 예외 없이 똑같았다.

영도에서도 물장사를 하시면서 집을 살 정도로 돈을 벌었고, 큰외삼촌은 그 돈을 바탕으로 나전칠기 공장을 조그맣게 차렸다.

사업 능력이 뛰어났던 큰외삼촌은 직원 대여섯을 두고 일할 정도로 공장을 키웠고, 둘째 이모는 공장 직원들 밥을 하면서 사업을 지원했다.

야무지고 욕심 많던 큰외삼촌이 일을 잘했고, 그걸 성과로 보여줬으니 외할머니도 더 믿었다.


문제는 영도 공장을 키우던 중 결혼하게 된 게 화근이었다.

큰외삼촌은 영도 섬을 벗어나길 바라는 큰 외숙모의 설득에 넘어가게 된다.


"내가 매달 용돈 잘 챙겨드리고, 엄마 돈 걱정 없게 해 줄 테니까 여기 집 팔고 같이 갑시다."


영도 집은 그냥 두고 공장만 빼가서 크게 차렸으면 문제도 없었겠는데 굳이 외할머니와 다른 형제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 같이 이사하게 만든다.

하긴 공부하던 엄마 외엔 모두 공장 직원이기도 했으니 당연한 것이지만.

갈등도 했지만 결국 외할머니는 큰외삼촌에게만 모든 것을 집중했다.

갖고 있던 집도, 돈도 큰외삼촌이 잘 처신하기를 바라면서 나전칠기 공장을 더 크게 차리는데 다 투자했다.

당시 철도관사라고 불렸던 그 큰 관사를 매입했고, 절반은 집으로 쓰고, 절반은 공장으로 만들었다.

다행히 공장은 잘돼서 직원은 영도에서보다 2배는 많아졌고, 새로 이사 간 동네에서도 부자라고 파다하게 소문이 날 정도가 되었다.

(엄마 담임선생님이 당시 가정방문을 하러 집에 왔을 때 응접실이 있는 거대한 집을 보고 얼어서 들어오질 못했었다고 하니까.)

외할머니는 당신이 갖고 있던 걸 투자해서 잘 됐으니 당연히 당신 몫은 다시 돌려줄 거라 믿었지만 천만에.

매달 주기로 한 돈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그 원인은 모두 큰 외숙모.

장남이기 때문에 부모를 모시고 산다는 명목으로 다 움켜쥐고 살면서, 그 당시 귀하고 좋은 건 몰래 숨겨서 큰외삼촌 가족들만 몰래 먹고 쓰는 치졸한 짓도 자주 일삼았다.

(그중 예로 엄마가 당시 귀하디 귀한 바나나를 장롱에서 몰래 꺼내먹는걸 문틈 사이로 본 적이 있다지.

그래서 마트에서 바나나를 살 때면 한 번씩 꼭 그 얘기를 하시곤 한다.)


나머지 형제들은 다들 나이가 되니 결혼하고 떠났고, 엄마는 고등학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계속 큰 외삼촌네와 함께 지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외할머니는 따로 당신 집을 구해달라 했지만 이미 재산을 가져간 뒤인데 줄 마음이 있을 리가 없지.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계속 함께 살고 있던 와중에 엄마에게 올케라는 그 여자는 본인이 폐결핵에 걸렸는데도 악의적으로 엄마를 식사 자리에 끌어들여 비빔밥을 같이 먹게 하고는 그대로 엄마에게 옮게 만들었다.

재산을 움켜쥐고 있는 그들은 병원을 다니고, 비싼 약을 지어먹으며 치료를 잘 받았고, 옮은 엄마에게는 적반하장으로 차갑게 굴었다.

결국 모든 재산은 그들 것이 됐고, 병을 얻은 엄마와 외할머니는 그 길로 쫓겨났다.

집도 절도 없이 맨 몸으로.

그게 외할머니의 진짜 한이 되었다.

영도에서 물장사를 하며 돈을 많이 벌었던 외할머니의 고생은 보람도 없이 모두 장남에게 뺏기게 되었다.

자신의 몫을 내놓으라고 찾아가기도 수차례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문전박대뿐이었다.

하루아침에 알거지 신세가 되어 산 입에 거미줄 칠 수는 없으니 다시 일을 하며 엄마를 어떻게든 낫게 하려고 애를 쓰셨다.

매일 거르지 않고 약을 먹어야 하는 엄마가 약해질세라, 비싼 녹용도 구해먹여보고 가물치도 곰국으로 끓여보고 좋다는 건 다 찾아 먹이려고 하셨고, 결국 1년여 만에 엄마는 치료에 성공하게 되었다.

외할머니가 막내딸을 살리기 위해 애쓰는 것에 비해 엄마는 삶에 대한 의지가 거의 없었고 죽는 것도 무섭지 않을 정도로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고 했던 걸 보면 외할머니는 그걸 눈치챘기 때문에 더 애쓴 건지도 모른다. 신체의 병도 병이지만, 그보다 삶에 대한 무기력이 찾아온 딸의 마음의 병이 더 두려웠는지도.


내가 던진 부메랑은 결국 나에게 다시 돌아오는 법.


사람이 사람에게 원한을 얻을 만큼 나쁘게 하면 절대 안 된다.

외할머니와 엄마를 천대했던 큰외삼촌은 결국 젊은 나이에 암에 걸리고 만다.

그리고 자신이 천대했던 어머니와 동생에게 준 것을 그대로 돌려받듯이 외숙모에게 상처를 받는다.

외숙모라는 나쁜 여자는 암으로 고통받던 남편도 어차피 죽을 사람이니까 싶었는지 바람을 피우며 천성을 못 버리고 최악의 짓만 골라서 했다.

탤런트 뺨치는 외모를 하고, 비싼 옷, 가방, 보석을 주렁주렁하고 그렇지 못한 악마 같은 속내를 잘도 감추며 큰외삼촌이 죽기만을 기다렸다.


"에이, 설마. 진짜 그랬겠어요? 그랬겠거니 한 거겠지."


엄마와 외할머니가 아직 뭘 모르던 내가 들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던 말들은 그래도 팔이 안으로 굽으니까 자식을 감싸다 보니 저렇게 얘기했겠지 싶어서 아닐 거라고 얘기했었다.

그렇지만 내가 겪어보니 아주 단편적인 상황일 뿐이지만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걸 확신하는 계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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