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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진 Sep 28. 2021

외할머니의 ‘외’ 자는

엄마의 엄마, 외할머니

1908년생.

유관순 열사와 불과 6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던 할머니의 주민등록증을 본 기억이 선명하다.

바지춤 속에 복주머니처럼 생긴 줄에 연결된 주머니를 열면 꼬깃한 지폐 몇 장과 볼펜 잉크가 번진 할머니의 주민등록증이 있었다.

어떻게 19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사람을 볼 수 있지?

철없는 나는 외할머니의 연세가 너무나도 경이롭고 신기했다.




외할머니는 43살 되던 해, 전쟁둥이 혹은 피란 둥이로 불렸던 50년생 막내딸 엄마를 밴 몸으로 피난길도 오르며, 그 시절 어르신들도 마찬가지 셨겠지만 험난한 세상의 풍파를 몸으로 맞은 분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망해 자빠져도 할머니는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는 엄마였다.

전쟁으로 부상당한 사람들이 상처에 감았다가 둔 피고름이 잔뜩 묻은 붕대들은 당장 입에 풀칠할 것이 없어도 선뜻 일하기가 꺼려질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두려운 빨래도 맨손으로 깨끗하게 빨아 햇볕 널어서 다른 부상자들이 다시 쓸 수 있도록 하셨다.

갓난쟁이를 키우려면 이 세상 어떤 허드렛일이라도 마다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전쟁통에도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을 치셨다.

당시 미국에서 의사, 간호사들이 의료지원차 와서 외할머니를 눈여겨봤다가 함께 미국으로 떠나자는 제안도 하셨다고 한다.

눈에 띌 만큼 일을 잘하셨지만 늦은 나이에 글도 못 배운 문맹으로, 갓난아이까지 책임져야 하는 상황으로는 엄두조차 못 내시는 일이었을 것이다.

외할머니에게는 93년의 인생이 주어졌지만, 이런 식으로 인생다운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전쟁이라는 큰 고난을 한 몸속에서 겪어내서였을까.

외할머니는 유독 막내딸과 함께한 세월이 길었다.

엄마와 나이차 많이 나는 다른 자식들은 빨리 출가했기 때문에 막둥이였던 엄마와 붙어있던 시간이 긴 탓도 있겠지.

아프기도 했던 막내딸을 위해 좋은 약을 손수 구해가며 최선을 다하며 키웠던 할머니.

그렇게 아끼는 막내딸이 결혼하겠다고 아빠를 인사시키러 왔을 때도 한번 보고는 엄마에게 반대의 의견을 비치셨었다.


"저눔아랑은 결혼하면 안된대이. 한눈에 봐도 게으르고 고생 길이 훤하다."


하지만 엄마는 외할머니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외할머니 말대로 고생길을 밟았고, 엄마와 삶의 궤도를 같이 한 외할머니도 역시 고생을 하셨다.


외할머니의 '외'자는 외로움의 '외'였다.


엄마가 결혼을 한 후에도 외할머니는 항상 근거리에서 맴도셨다.

그게 우리 집이 단칸방에서 두 칸 월세방으로 옮기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되기도 했다.

항상 우리와 근처에서 사셨던 할머니는 너무 연로하셨기 때문에 결국 엄마가 모시고 살기로 했다.

햇수로 따지면 내가 5학년 무렵부터 중3 때까지 약 8년 정도를 외할머니와 같은 방에서 함께 살았다.

(말이 좋아 같은 방이지 점점 작아지는 집에서 할머니의 마음은 도대체 얼마나 불편하셨을지...)

어쩌다 보니 함께 동거하는 가족이 됐지만, 나는 그저 까마득히 어린 손녀일 뿐.

같은 방에 있어도 73년이라는 간극 때문인지 할머니에겐 73년만큼 도움이 안 되는 그저 어린아이 일 뿐이었다.

할머니의 더욱 심한 사투리를 가끔 못 알아들어서 소통에 문제가 생긴다던지, 세대차이라는 말조차 우스운 인생 차이가 느껴지거나 했다.

그런 엄청난 시간의 거리에도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할머니의 가슴 시린 외로움, 한(恨).


내가 기억하는 외할머니는 늘 외로웠다.

작은 방에서 나와 동생과 함께 부대끼며 지낸 할머니께 허용된 공간은 딱 1평이었다.

방에 계실 땐 누워 계신 일이 많았고, 특별히 할 일도 없어서 늘 무료하셨다.

동네에 친구도 없었고, 자유롭게 다닐만한 여력이 전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나 연로하신 데다 장작처럼 마른 몸으로 여든이 넘은 연세에 허리가 90도로 굽어 지팡이 없이는 걷기도 힘드실 정도였는데 오죽할까.

(제대로 된 지팡이조차 살 여유가 없어서 누가 내다 버린 우산을 살만 다 떼어내고 꼬챙이만 사용하신 적도 있었다. 잊고 있던 기억이 하나씩 떠오르니 가슴이 미어질 듯 아프다.)

그러나 몸의 노쇠보다 마음의 힘듦이 더 고통스러우셨기 때문일까.

집 앞에 놀고 있던 공터에 호박을 심기도 하셨고, 동네에 빈 상태로 방치된 천막으로 된 곳에는 할머니만의 아지트도 만드셨다.

학교를 가고, 일을 다녔던 우리와 부모님에 비해 한 평 방안에 인생이 갇혀버린 외할머니가 쉴 공간은 사실 없었다.

아무도 없을 땐 그래도 눈치 안 보고 누워계실 순 있었겠지만 우리가 금방 학교에서 돌아오고 엄마가 일하고 돌아오면 불편한 마음이 방 안에 넘쳐흘러 피하고 싶은 공간이 필요하셨을 것이다.

그런 외할머니에게 유일한 피신처였던 아지트는 없어서는 안 될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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