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지옥이었던 고등학교
집에서 버스 시간만 40분이 넘고, 진학반으로 1시간 일찍 학교로 가야 해서 새벽 6시면 나서야 했던 등굣길.
얇디얇은 교복에 겉옷을 용납하지 않고, 커피색과 살색의 스타킹이 아니면 허용하지 않던 융통성 제로의 교칙 덕분에 겨울이면 턱까지 덜덜 떨면서 등하교를 했다.
선풍기도 난로도 없던 열악하기 짝이 없던 시설로 같은 교실에 앉은 친구들의 온기만이 유일한 난로가 되어 교실 내부를 데우곤 했다.
하지만 열악한 시설보다 몇몇 선생님의 수준 낮은 태도와 언행에 더욱 실망을 했었다.
지금도 어제 일처럼 머릿속에 박혀버린 고3 담임선생님의 말.
학급회의 안건으로 나온 두발 자유화에 관한 교칙 변경 요청에 대해 학생들 모두 진지한 태도로 임하고 있었다.
귀밑 3센티미터로 항상 유지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 머리 길이를 유지하려면 미용실에 자주 가야만 했고, 나는 그런 돈도 부담스러워 차라리 머리카락을 기르면 미용실 비용을 아껴 문제집을 하나 더 살 수 있겠다 싶었다.
실제로 미용실 가는 비용을 아껴보려고 단짝 친구와 좁디좁은 욕실에서 서로의 머리카락을 잘라준 적도 있으니까.
나는 그만큼 절실했다.
다른 친구들이야 미용적인 면 때문에 요청한 것도 있겠지만, 나는 원래 그런 건 별로 관심 없는 성향이고 머리카락을 기르면 그저 편하게 질끈 묶고 다니는 것도 편하기 때문에 더 두발 자유화에 찬성했다.
학급회의는 다수결에 의해 두발 자유화 찬성으로 더 기울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전 학급을 대상으로 하여 진행하려는 중이었다.
그런 민주적인 방법에 찬물, 아니 똥물을 끼얹은 건 담임선생님의 추접스러운 발언이었다.
"머리는 뭔 놈의 머리를 기른다고. 머리 기르는 건 술집 여자들이나 기르는 겁니다. 학생은 머리가 짧아야 단정하고 옳은 거예요."
순간 머리를 세게 두드려 맞은 기분이었다.
어찌 선생이라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 저렇게 수준 이하의 발언일 수가 있을까.
아침부터 술냄새 풀풀 풍기면서 출근했던 사람이라 원래가 기대는 하지도 않았지만 역시 3년이나 이 학교를 다닌 것은 후회였다.
97년 당시 수학여행비가 88000원.
너무 비싼 비용 때문에 나는 수학여행 대신 학교 등교를 택하기로 했었다.
어차피 같은 반엔 친한 친구도 별로 없고, 기대될만한 일도 없었기 때문에.
안 가겠다는 마음을 먹고 집에 왔지만 엄마가 그래도 고등학교 때 추억인데 가라고 하시며 저 돈을 구하셨다.
솔직히 못 간다고 서럽거나 후회하지 않았을 건데 엄마는 내가 걱정이 되셨나 보다.
극구 말리는 엄마와 단짝 친구의 설득에 결국 가기 싫은 수학여행을 가기로 결정했다.
엄마의 등골을 빼가면서 가게 된 수학여행이 즐거웠으면 너무나 좋았겠지만 나는 긴 버스 여행에 지친 데다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버스에서도 이어폰만 낀 채로 내내 자기만 했으며, 잠깐씩 도착지에 내려 단체 사진만 찍고 다시 버스에 오르는 식의 여행답지 않은 여행을 이어갔다.
그중의 절정은 숙소.
인당 비용이 적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히 제법 괜찮은 숙소로 잡았을 거라 생각했지만 천만에.
한 학년 전체가 머물기 위해 구한 곳은 오래된 여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샤워장은 단 한 곳이었고, 커다란 대중탕이 가운데 덩그러니 있는 곳이었다.
물론 방마다 작은 화장실과 세면대 정도는 있었지만 긴 여행길에 머리를 안감을 수도 없고 찬물만 연신 쏟아지는 샤워장에서 겨우 머리 감는 정도만 해결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물이 센물이라 미끌거리는 통에 거품도 제대로 나지 않았다.
무대라고 꾸며놓은 곳에는 정육점에서나 볼 법한 붉은색 형광등만 을씨년스럽게 붙어 있었고 그게 캠프파이어 장소의 전부였었다.
나는 당연히 이 부당한 수학여행비가 불만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침 맞은편에 제법 근사한 숙소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어떤 남학교에서 수학여행을 온 듯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친구를 이끌고 맞은편 숙소 가까이 다가가서 혹시 수학여행비를 얼마 내고 온 거냐고 물었는데 우리보다 무려 2만 원 가까이 저렴하게 지불했다는 것을 알고 너무나 화가 났다.
이후 학교에서 이 안건으로 학급회의를 진행하려 했으나 친구들의 묵비권 행사로 학교 측으로 항의하는 것은 무산되고 말았다.
나의 진로의 고꾸라짐만이 문제가 아닌 이런 기도 차지 않는 학교에서 나의 유일한 버팀목은 2학년 때 뵙게 된 국어 선생님이었다.
40대셨던 국어 선생님을 짝사랑하게 되면서 나는 학교에 갈 이유가 생기게 되었다.
선생님을 사모하게 된 것은 넘치는 매력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50분 수업이면 앞 뒤로 10분씩 총 20분은 자유시간에 가까웠고, 실제 수업은 30분만 하셨는데 짧고 굵게 진행하시는 수업은 삼천포로 한참을 돌아다니셔서 이게 수업과 무슨 상관이지 싶은데 어느새 그 이야기들이 수업 내용이던 마술 같은 경험을 하곤 했었다.
그러나 삼천포를 아무리 돌아다녀도 선생님이 맡으신 반은 늘 국어 평균 성적이 1, 2, 3등을 차지하곤 했다.
그런 선생님의 수업의 노련미에도 감탄했고, 때로는 인생 이야기, 삶의 이야기 등을 들으면서 더욱 선생님을 사모하게 되었다.
학기 초 전체 조례 때 선생님 소개 시간에 그 선생님을 호명하면 아이돌 부럽지 않은 함성소리가 운동장을 메우곤 했다.
그만큼 선생님을 좋아하는 학생들도 많았고, 선생님의 눈에 들기 쉽지 않았다.
그런 인기 많은 선생님께 내성적인 내가 존재감이 부각된 사건이 있었는데 같은 반 친구가 내가 선생님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짓궂게도 수업 끝무렵에 내 이름을 부른 일이었다.
선생님께서는 뭐라고 한 거지? 라며 친구들을 향해 되물으셨고, 이에 놓칠세라 내 이름을 얼른 불러 선생님께 각인을 시켜줬다.
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는데 원래 내 자리는 맨 뒤에서 두 번째였으나 선생님을 가까이서 보겠다고 교탁 바로 앞 친구와 자리를 바꿔 앉았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아무개가 누구냐며 날 찾으시는데 나는 부끄러움에 교탁 바로 아래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친구들이 날 지목해서 선생님께 들켰고 그 일 이후로 나는 선생님과 얼굴 튼 사이가 됐다.
얼굴 트자마자 나는 교무실을 쉬는 시간마다 들락거리고, 선생님께 진학상담을 하고,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선생님과 한 번이라도 더 마주치려고 애를 썼었다.
3학년 때까지 쉬는 시간 시간마다 6층 교실에서 1층인 교무실까지 어찌나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던지 강제 다이어트가 되어 교복이 너무 커져버린 사태가 생길 정도였으니까.
선생님 생신에 의미 있는 축하를 해드리고 싶어서 2단 케이크를 우리 동네 빵집에서 구입해서 40분 버스를 타고 낑낑거리며 가져가고, 교무실 앞에서 초를 켜고는 선생님들 민폐 되게 생일 축하 노래하면서 입장을 했었다.
그런 제자의 만행에도 불구하고 다른 선생님들도 이벤트에 함께 축하해주시고, 모든 분들이 케이크를 나눠 드시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남자 친구라도 저렇게는 안 할 것 같은데 그때의 나는 여고생이었고, 내가 유일하게 마음을 붙일 단 한 가지 이유였기 때문인 것 같다.
나를 버티게 한 버팀목이셨기 때문에...
선생님은 건강이 아주 좋은 편은 아니셨다.
마른 체형에 얼굴도 검은 편이셨는데 피부가 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떨 땐 입원을 하실 정도로 아프시기도 했다.
너무 길게 병가를 내신 일이 있어 걱정으로 학교 공부가 안될 정도인 때가 있었는데 교무실에서 선생님들께 간곡히 부탁을 드려서 선생님 댁으로 연락을 드리기도 했었다.
다행히 퇴원 후 집에서 요양 중이셨는데 너무 걱정하는 나를 위해 댁으로 초대를 해주셔서 선생님을 뵙게 되었다.
혈색이 좋지 않은 선생님의 얼굴을 뵈면서 쾌차하시도록 말씀을 드리고 사모님께도 안부인사를 드렸는데 걱정 어린 내 얼굴에 사모님께서 학종이 선물, 케이크 얘기도 들었다며 되려 선생님 챙겨줘서 고맙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런 나의 스승님이셨던 선생님과 대학 졸업 후 사회인이 된 나를 축하해주시려고 호프집에서 오랜만에 뵙게 되었다.
선생님과 제자가 아닌 인생 선배로서 이제 막 시작하는 사회초년생을 향한 따뜻한 조언들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들, 힘든 일이 많을 테지만 잘 이겨낼 거라 생각하신다는 믿음을 한 아름 안겨주셨다.
그렇게 쓰디쓴 흑맥주를 마신 일을 끝으로 선생님과의 연락은 끊어지게 되었다.
이후에도 몇 번 수소문하고 찾아뵈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나의 사회생활과 지역을 달리하는 이사로 결국은 뵙지 못하게 되었다.
엄마와 비슷한 나이셨으니까 벌써 은퇴를 하셨겠지?
학교 생활에 마음도 못 붙이고 방황하던 제자를 그래도 끝까지 학교 생활 마무리하도록 이끌어주시고, 담임 선생님도 아닌데 진학 상담도 진지하게 해 주시고, 시간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나를 최대한 챙겨주신 선생님께 이 글을 빌어 깊은 감사와 존경을 표한다.
"선생님, 제가 중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다 선생님 덕분이었어요. 너무나 감사하고, 진심으로 마음 깊이 존경합니다. 학창 생활 12년에 가장 큰 은사님이셨습니다. 저는 어느덧 그때의 선생님 나이 또래가 되어 생의 고락을 견디고 파도에 넘실거리며 선생님 말씀처럼 조금씩 이겨나가고 있습니다. 늘 건강하세요. 꼭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