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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진 Nov 07. 2021

12월 31일

엄마의 시간 속으로

먹고사는데 정신이 팔려 지내는 동안 한 해가 훌쩍 지나가 버렸다.

거리에 세워진 크리스마스트리와 한해를 마감하기 위한 분주한 사람들 틈 사이로 나는 새로운 곳에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가는 중이다.

빠듯한 살림에 한 푼이 아쉬운 생활비로 머리 아픈 중인데 마침 같은 라인의 새댁이 소개를 해줬다.

자신의 남편이 다니는 나이트클럽에서 연말 특수 덕에 일손이 부족한 주방에 사람이 필요하다고.

나는 애들한테 뭐라도 사 먹일 수 있겠다 싶어 다른 사람이 채갈세라 얼른 가겠다고 했다.

어차피 집에 있어봐야 우울한 연말을 보낼 것이 뻔한데 돈이라도 벌 수 있으니 다행이다.

애들한텐 오늘 일하러 간다고만 하고 조용히 나섰다.

처음 하는 일이라 좀 긴장되긴 한데 괜찮겠지?




한해의 마지막 날 회포를 풀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가득하다.

나이트클럽 내부의 화려한 조명과 심장을 두드리는 음악과는 별개로 나는 주방에서 정신없이 과일을 깎았다.

밀려드는 사람들의 주문을 소화하기 어려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솜씨고 맛이고 생각할 틈이 없이 일하기 바빴고 잡생각을 할 수 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한 해가 어물쩍 넘어갔다.

밖을 나오니 어느새 해가 눈이 부시게 내리쬐고 있었다.

손도 아프고 너무나 피곤한 밤이었지만 하루 일당을 받고 아이들을 먹일 돈이 생겼다.

그렇게 무겁기 짝이 없는 몸뚱이를 끌고 집으로 향했다.




'찰칵'

열쇠로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추위에 잔뜩 힘을 주고 왔더니 집안의 따뜻한 온도에 피로가 한순간에 몰려왔다.

얼른 씻고 자고 싶다는 생각만 밀려왔고, 무거운 눈꺼풀이 나를 덮치려고 했다.

조용히 가방을 내리고 씻으려고 하는데 남편이 방에서 나왔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말했다.


"니 어디 갔다 오노?"


"......."


"니 대체 어디 갔다 오냐고!"


"하루 일당 벌러 나갔다 왔다 안하요. 옆집 새댁이 남편 일하는데 일손 부족하다고 하루 일을 부탁해가지고..."


"그래서? 일하겠다고 갔다 온 데가 나이트클럽이가?"


"내가 놀러 갔다 왔나? 주방에서 일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구만 나이트면 어떻고, 다른 거면 어떤데?"


"어디 오밤 중에 집구석에 안 있고, 밤에 기어나가서 외박을 하고 온단 말이고? 니가 제정신이가?"


"아, 진짜. 피곤해주겠구만 왜 그라는데?"


눈을 부라리며 잔뜩 화난 목소리로 나를 압박한다.

그리고는 기어이 욕실 구석으로 몰더니 변기 쪽으로 밀어 다리가 변기 속에 빠졌다.

아픈 것도 아픈거지만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생활비도 없고, 애들 먹일 반찬거리도 없어서 몸뚱이가 쇳덩이마냥 무겁지만 그래도 일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밤새 일하고 왔더니 이런 소리를 듣는다.

내가 뭘 잘못한 건지 모르겠다.

둘 다 언성이 점점 더 높아지고, 남편이 나를 때릴 기세로 팔을 쳐들어 올릴 때쯤 방에서 큰소리에 놀라 나온 애들을 보자마자 남편은 한마디를 남기고 방으로 쌩하게 들어가 버렸다.


니 나중에 보자.


남편은 택시를 몰고 다니면서 어디서 나쁜 여자들 행실만 듣고 다니는 건지 입만 열면 행실 나쁜 여자들 욕하기 바쁜 사람이다.

그 때문인지 행여나 내가 엉뚱한 짓이라도 할까 싶어서 일절 누군가와 어울리는 것도 허락하지 않고, 밤에 어딜 가는 것도, 외박을 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달랑 2명이서 일하는 공장에 처박히게 된 것도 어쩌면 남편 때문인지 모른다.

동네 보험 일을 하는 사람이 내가 공장에 다니며 힘들게 일하는 것보다 경력도 쌓고 일하는 데 따라 대우받을 수 있는 보험설계사를 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며 추천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보험설계사의 보 소리만 꺼내도 남편은 길길이 날뛰었다.

그 추잡한 머릿속에는 드러운 생각만 가득 차서는 보험설계사 업을 하는 사람들을 낮잡아 욕부터 했다.

그리고 나 또한 그 일을 하면 곧바로 그런 인간이 될 거라며 흉악스러운 결론을 미리부터 내린다.

얼마나 나를 못 믿으면 저런 생각으로 똘똘 뭉친 걸까.

지금까지 산 세월이 얼만데 나를 아직도 모르는 건가?

나는 이 사람과 살면서 얼마나 더 나의 자존감을 짓밟혀야 하는 걸까.

이미 지칠 대로 지쳤지만 날마다 더 힘이 빠져가는 생활이 지속되고 있었다.

어쩌면 제발 이 지겨운 생활이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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