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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진 Nov 14. 2021

파국 I

엄마의 시간 속으로

"돈 내놔라."


먹고 죽을래도 돈 없다고 하니 내 목에 싱크대에서 꺼낸 칼을 들이민다.

헛웃음이 난다.


"죽여라. 어디 죽여봐라. 나는 하나도 무서울 거 없고, 살 마음도 없다."


삶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이 독기만 가득 찬 내 눈을 보고는 칼 든 손을 슬며시 내린다.

돈이 급하다고 마누라 목에 칼을 들이미는 미친놈이랑 살 필요가 없지 않나.

나는 이제 이 관계가 진짜 끊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엔 개인택시를 타게 되었다.

너무나 오랜 시간을 그렇게도 간절히 바랐던 일이건만, 이상하게도 기쁘지가 않았다.

십몇 년을 내 모든 걸 쏟아서 만든 결과물이었다.

운전은 남편이 했지만 운전 외의 모든 것은 다 내가 뒷바라지해서 이룬 일이었다.

그 사실은 남편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도 너무나 잘 아는 것이기도 했다.


"행님 개인택시 타게 하는 거에 8할은 형수님이 하신 거지. 우리가 잘 알고 말고요."


비번날이 되면 어울리는 그들은 남편이 택시 일을 하면서 만난 동료이자 동생들이었다.

가끔 집으로 놀러 와 술을 먹기도 하는 그런 사이.


내가 공장에 일을 하고 있던 어느 날 남편이 그들과 공장으로 방문한 일이 있었다.

정신없이 일을 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그들 중 한 명이 얘기했지.


"형수님 진짜 고생이 많네. 형수님 이렇게까지 고생하시는 줄 미처 몰랐네. 행님, 고마 가입시더."


마누라 일하는데 이죽대며 서있던 남편을 그대로 끌고 밖으로 사라졌다.




'꿈이었으면 좋겠다.'

그녀로부터 얘기를 전해 듣는 순간 그 모든 것이 꿈이기를 바랐다.
이게 나의 현실이 아니기를...
하지만 잔혹한 현실은 나를 갈기갈기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집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다짜고짜 엉엉 울면서 나에게 뜻 모를 소리를 해댔다.


"언니, 언니는 아무것도 모르지요? 아저씨가 뭐하고 돌아다니는지 언니는 진짜 꿈에도 모를끼라."


"무슨 소리고? 뭘 한다고?"


그녀의 남편은 남편과 어울리는 동생 중 한 명이다.

그런 그녀가 평소 둘이 따로 만나는 일도 없는 사이인데 어쩐 일로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원래라면 한참 공장에서 일할 시간이라 만나지도 못했을 테지만, 경기가 나빠 공장에 일이 없어서 당분간 쉬는 중이었다.

남편은 개인택시를 탔고, 일은 쉬게 되었으니 만년만의 휴식을 즐겨야 옳은 일이겠지만 마음이 전혀 그렇지 못한 참이었다.

개인택시를 탔지만 여전히 집으로 벌어오는 돈은 없었고, 내가 벌어오는 돈도 사라졌으니 가슴 압박은 더 심해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그녀가 우리 집으로 뜬금없이 찾아왔다.

내내 울며 불며 한탄을 섞어 말을 쏟아내던 그녀는 내게 그간의 일을 일러주고 싶어 안달 난 모양새였다.


"언니, 갑시다."


그녀의 남편은 어딜 가든 그녀를 데리고 다녔지만 전날 대판 싸우고는 버리고 나갔다.

그게 화근이었다.

자신의 남편에게 뿔이 단단히 난 그녀는 남편과 무리들이 같이 있는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택시를 타고 한참을 달려 어느 한적한 음식점 앞에 도착했고 낯익은 택시 4대가 나란히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일 가겠다고 나간 사람이 왜?

내부로 들어가니 왁자한 소리가 나고, 신발들이 모여있는 방이 있다.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쉬고는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상 가득 음식이 놓여있고 각자의 자리 앞에 술잔이 놓여있었다.

그 옆에는 화투패와 카드들이 담요 위에 놓여있다.

그리고 나를 마주한 4명이 모두 일시에 얼어붙어 앉아있다.


"니 여기서 뭐하노?"


여태 나보다 나이가 적어도 남편이라는 이유로 존대해왔지만 그런 예의를 차려주기엔 내 이성이 끊어진 상태였다.

여기 올 이유가 없는 나의 등장에 날 찾아온 동생의 남편은 그녀를 확 넘어뜨려 목을 질끈 밟았다.


"야 이 년아, 형수님을 여기로 데려오면 어짜는데?"


목을 밟혀 죽겠다고 고함치는 그녀를 빼내기 위해 멀대같이 키 큰 그에게 퍼뜩 다가갔다.

나는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발모가지 안 거두나?"


원래도 힘이 좋은데 악에 받쳐 죽일 기세로 멱살을 쥐고 잡아당겼다.

나의 기세에 그는 그녀를 밟고 있는 발을 슬그머니 치웠다.

그리고 그에게서 빠져나온 그녀는 곧장 줄행랑을 쳤고, 나머지 3명도 각자의 차를 타고 모두 빠져나갔다.

애들 아빠, 그 쓰레기만 얼이 빠져 앉아있다.


"야, 이 개 같은 인간아. 니 대체 여기서 뭐하노?"


"맨날 캐피탈에서 돈 쳐 빌리고, 내한테는 돈 내놔라 협박하고, 사납금 핑계대면서 일 안 하던 게 도박하고 쳐 돌아댕기느라 그랬던 거네. 내가 공장에서 죽어라 뼈 빠지게 일하는 동안에 니는 온 동네 맛집 쳐 돌아다니면서 도박이나 하고 그랬던 거네. 20년 가까이를. 이제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네. 이제서야."


성이 잔뜩 난 나를 향해 일단 나가자고 한다.

나는 상 위에 있던 소주병 하나를 챙겨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내 모든 것인 그 개인택시를 타고 자리를 이동했다.

적막한 차 안 공기를 가득 안고, 우리 동네 어귀 조용한 곳에 도착했다.

차 내부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주머니에 넣어뒀던 소주병을 꺼내 그 자리에서 반 병을 둘러마셨다.

그리고 나는 이대로 남편을 죽이고 나도 죽어버리려고 차 문을 열고 인도 턱에 소주병을 탁! 하고 내리쳤다.

아주 날카롭게 깨지길 바라면서.  

애들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소주병의 목 아래 모든 부분이 댕강하고 다 깨져버렸다.

분노에 차오른 내 힘이 주체가 되지 않은 탓일까.

내 손아귀에 덩그러니 남은 소주병의 목을 보며 어처구니없는 너털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남편이라는 작자는 적잖이 긴장을 한 탓인지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니를 확 찔려 죽이고, 나도 죽으려고 했는데 니는 운 좋은 줄 알아라."


썩어 문드러진 가슴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이라는 쓰레기는 나를 내려주고는 7평 숨 막히는 공간에 같이 있다가는 큰일 날 것 같은 예감에 그 길로 집을 나가버렸다.

꿈같던 모든 순간이 허물어지자 뜨거운 눈물이 억수같이 쏟아져내렸다.

그렇게 나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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