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진 Dec 07. 2021

할머니를 모두 잃었다.

19살, 실패자의 기억

1999년 3월.

외할머니께서 집으로 들어서다 대문 턱에 걸려 넘어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93살 고령의 나이에 넘어지는 사고는 생명을 좌우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다.

그 위험한 일은 외할머니께 골반 골절이라는 중상으로 적용되었고, 그대로 몸져누우시고 말았다.

큰 이모로부터 외할머니의 소식을 전해 듣고 온 가족은 그대로 이모 댁으로 출발했다.


"엄마...."


다급한 마음으로 이모 댁에 들어서자마자 엄마는 외할머니가 계신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미 많이 안 좋으셨고, 이승과의 끈을 겨우 붙잡고 계신 정도였다.

함께 모인 이모들과 외삼촌, 그리고 엄마는 외할머니의 마지막을 살뜰히 살피며 몸을 닦고, 손을 잡고, 이모들은 모두 할머니의 마지막을 지키고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이모들이 잠시 자리를 벗어났고 엄마만 남았을 때 외할머니는 홀연히 이 세상과 작별을 하셨다.

임종을 지키는 자식은 따로 있다고 하던가.

외할머니의 아픈 손가락이었던 엄마가 혼자 지키던 그 찰나에 93년이라는 긴 세월의 끈을 놓으셨다.

지겨우리만큼 견뎠고, 아파했고, 상처 받으며 한 세월을 사셨던 그 길이 비로소 끝났다.

엄마는 외할머니를 늘 곁에 두고 사셨다가 마지막에 사는 게 힘들다는 핑계로 소홀히 한 것에 많이 아파하셨다.

조금만 숨 쉴 구멍이 있었으면 엄마를 그렇게 두지 않았을 거라며 내내 후회하셨고, 많이 우셨다.


더 살믄 구신이다. 그마이 사셨으면 인자 가실 때도 됐다.


아흔 살이 다가오는 사돈이 너무 오래 살아도 자슥들에게 민폐라며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던 친할머니.

외할머니의 임종 소식에 눈물을 훔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잘됐다며 나이 더 들어봐야 좋을 게 없다고 잘된 일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말씀을 하신지 정확히 100일째 되던 날.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우리 가족은 한방에서 모두 잠이 들었었고, 그날따라 전화받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던 내가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소식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얘기였다.

잠결에 받은 전화라 너무 어안이 벙벙했고, 잠들어 있던 부모님께 그대로 얘기를 전했다.

아빠는 두 눈을 번쩍 뜨며,


"누가 돌아가셨다고? 할머니? 우리 엄마?"

라고 말했다.


아빠에게서 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은 건 그때가 유일했다.

단잠을 자던 우리 가족은 또 한 번 다급히 채비를 해서 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할머니의 단출하고도 오래된 살림살이가 있는 그 셋방 집.

우리의 추억이 묻은 그 집에서 할머니는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커다란 밥통에 갓 지은 밥이 있었고, 할머니는 물 받은 밥그릇에 주걱을 넣어두셨다.

한술 뜨려고 하셨다가 몸이 고단해서 다시 방에 누우신 것이 마지막인 듯했다.

심장질환이 있으셨지만 이렇게나 갑자기 세상과 이별하실 줄은 몰랐다.

그렇게 일흔여덟 연세에 세상과 작별을 하셨다.


손녀인 나와 동생에게 한없이 다정하셨던 친할머니.

방학 때 할머니 댁에 놀러 가서 우리 둘만 덩그러니 할머니 댁에 두고 가면, 어린 동생은 지겨움에 몸부림이 났다.

볼 수 있는 TV 채널은 KBS1 채널뿐이었고, 촌동네라 이렇다 할 구경거리도 없었다.

유일한 즐거움이라면 할머니가 꼬깃한 용돈을 손에 쥐어주시면 그 돈을 가지고 맞은편 문구점 겸 슈퍼마켓에 가서 새 샤프 하나 사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해주시는 음식도 맛있었고, 어촌이라 횟거리를 먹을 수 있다는 것도 행복했다.

고등어로 추어탕처럼 만들어주셨던 국도 최고였고, 길고양이 먹으라고 밥도 챙겨주시는 우리 할머니는 진짜 좋은 분이었다.

입을 외투가 마땅찮은 우리 둘을 버스에 태우고 환승에 환승을 거듭해서 도착한 남포동에서 맛있는 음식도 사주시고 커플 외투도 사주신 것을 잊지 못한다.

할머니 볼을 내 볼에 부비부비 하셨던 기억도.

보일러가 지나가는 자리의 장판이 까맣게 변할 정도로 뜨거웠던 아랫목에 놓여있던 밥그릇도.


친할머니처럼 살갑게 대하시진 않았지만 원더우먼 버금갔던 외할머니.

방에 이따금씩 나타났던 무적의 미국 바퀴벌레도 맨손으로 잡으셨던 일.

바짓 춤에 달린 복주머니에서 꼬깃하게 모으신 돈을 용돈으로 한 번씩 주셨던 것도 사무친다.

철부지 어린 손녀와 아웅다웅 다투고, 소화기관이 나빠 3 숟갈 밖에 되지 않던 밥공기도.

주무실 때 머리맡 컵에 담아 두셨던 틀니도.

엄마 아빠께 흠씬 야단맞으면 보듬어주시고 말려주셨던 품 속도.

그 모든 것들을 추억으로 남기시고는 한 해에 함께 떠나셨다.


그래.

앞니 빠지는 꿈이 예사 꿈은 아니지.

나와 동생은 동시에 할머니 두 분을 잃었고, 엄마와 아빠는 완전한 고아가 되었다.

아무 능력도 없던 그때 말고 좀 뒤에 돌아가셨다면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 좋은 곳도 같이 갔을 텐데.

지금도 이따금씩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하지만 할머니의 죽음도 우리 집의 갈등을 수습하진 못했다.

같은 아픔을 겪으면 서로 마음을 보듬어주며 갈등이 봉합되기도 하지만 우리 집은 예외였다.

엄마를 잃은 나의 부모님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있었고, 아슬아슬하게 겨우 붙어있는 끈처럼 곧 떨어질 듯 불안만 커져갔다.

늙은 부모에게 걱정 끼치지 않으려고 겨우 붙잡고 있던 관계에 오히려 힘이 실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초조하고 불안했다.

사이가 나쁠지언정 그래도 가족으로 묶여있고, 아빠가 있고 엄마가 있다는 것이 큰 위안이었기 때문에 혹시 이 관계가 깨어질까 봐 머리가 지끈거렸다.

엄마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몰랐기에 철없이 내 걱정이 앞섰겠지.

지금은 내가 그때 그런 생각을 가졌다는 것조차도 엄마께 미안한 마음이다.

어쩌면 나의 두 할머니는 순리대로 흘러가도록 이끄셨는지도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파국 II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