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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진 Dec 13. 2021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19살, 실패자의 기억

고등학교 졸업으로 지겨운 고등학교 생활은 끝을 맺었지만 동시에 대학 진학에 실패했다.
사실 대학 진학에 성공했다고 해도 한 푼도 여유 없는 우리 집에서 등록금이라는 문제에 부딪혔을 것이다.
차라리 잘된 일이라 여기고 그때그때 닥치는 것에만 집중했다.


2월.

졸업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구해야 했다.

그때엔 벼룩시장이나 지인을 통해서 아르바이트를 구해야 했는데 마침 친구가 이모네에서 일손이 필요하다고 했다.

친구의 이모는 유명한 교복 브랜드의 가게를 운영 중이었다.

귀한 아르바이트를 구하게 되어 기쁜 반면에 거리가 너무 멀다 보니 2시간 가까이 걸리는 곳을 버스로 가는 것도 일이었다.

새벽부터 출발해서 동이 트며 도착한 가게에는 전단지들과 사탕, 휴대용 화장지 등의 물건이 준비되어 있었다.

새 학기 시즌에 앞서 교복을 맞추러 올 학생들을 잡기 위해 학교 앞에서 나눠줄 전단지를 돌리는 간단한 일이었다.

불과 3년 전에 학교 앞에서 받던 그 전단지를 내가 나눠주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한 번도 낯선 사람들을 향해 뭔가를 나눠주는 일을 하지 않았는데 닥쳐서 하려고 하니 쉽지 않았다.

어색한 공기와 창피함을 등에 지고, 하교하는 아이들을 향해 친구와 열심히 전단지를 나눠줬다.

한겨울 바람도 많이 부는 곳에서 칼바람에 살이 베이는 고통이 느껴졌다.

어차피 시간이 해결할 일.

몇 시간의 노동으로 생애 처음 내 손으로 번 돈을 손에 쥐고 집으로 돌아왔다.


3월.

그로부터 보름여의 시간이 지나 친구는 학교로, 나는 다시 친구의 이모네 가게로 일을 하러 가게 되었다.

너무 멀어서 솔직히 가고 싶지 않았지만 친구의 부탁인 데다 딱히 할 일이 없어진 백수 입장에서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아니, 뭐라도 해야 집에서 눈치가 덜 보이니까 가야 했다.

이번엔 한 달을 일해달라고 했다.

뭐 계획된 일이 없었으니 그러겠다고 했다.

전단지를 열심히 돌린 보람도 작용했는지 일대의 학생들은 교복을 많이도 맞췄다.

한 달간 내가 할 일은 교복을 맞추러 온 학생에게 옷을 찾아주고, 사이즈가 없는 옷은 다른 동네에 있는 두 번째 매장에서 옷을 수급해오고, 반대로 그 매장으로 옷을 가져다 주기도 하는 일이었다.

너무 바빴고, 실수하지 않기 위해 잔뜩 신경을 곤두세웠다.

일이 많다 보니 제 시간이 마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며칠 일하면서 시간을 넘기는 일이 잦았지만 어차피 시급제니까 더 일한 만큼 돈을 벌 수 있다는 기분에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출퇴근 시간이 많이 걸리고 내가 더 일찍 오길 바랐던 친구의 이모는 나에게 집에 숙식을 제공할 테니 그렇게 해줄 수 있냐고 했다.

전단지 돌리면서 친구와 한 번 가긴 했지만 나에겐 생판 남인데 싶어 썩 내키진 않았다.

그러나 이것도 어차피 노동의 연장이지 싶어서 돈 벌 욕심으로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숙식에 총알택시까지 경험하며 불같이 일했던 한 달이 지났고, 나의 노동의 대가를 돈으로 받는 날이 왔다.

제대로 된 한 달 월급이라니.

속으로 뿌듯한 마음이었고 나중에 대학 갈 때 등록금에 보태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친구의 이모로부터 건네받은 봉투를 받으며 수고했다, 감사하다 서로 덕담을 주고받았다.

앞에서 바로 열어보긴 좀 힘드니까 인사를 꾸벅 드리고는 집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소심하게 봉투를 가방 속에 감춰서 열어봤다.


하나, 둘, 셋, 넷...


얇은 봉투 속에 들어있던 돈은 15만 원.

내가 생각한 금액에 한참 못 미치는 금액이었다.

1999년도 시급이 1,525원.

하루 8시간 이상 근무.

야간 근무 병행.

주 6일, 혹은 주 7일 근무도 포함.

아무리 못 받아도 30만 원은 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절반인 15만 원이라니...

너무 속이 상했고, 자존심이 뭉개졌다.

그렇게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내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던 이승환의 [내가 바라는 나] 가사가 갑자기 마음속으로 훅 들어오면서 눈물이 솟구쳤다.

당장이라도 따지는 게 맞겠지만 나의 둘도 없는 절친의 이모였기 때문에 따질 수가 없었다.

월급 받고 기분 좋게 들어왔어야 할 내가 침울한 표정으로 들어와 울고 있으니 엄마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자초지종을 엄마께 말씀드리니 엄마도 엄청 화가 나셔서 따져 물을까 하셨지만 그냥 두시라 했다.

어차피 한 달 일하고 말 일이고, 엄마끼리도 그런 일로 마음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 15만 원은 고생해서 벌었는데 쓰고 싶은데 쓰라는 엄마의 말씀으로 등록금으로 가지 않았고, 반발심리로 작용해서 CDP를 구매하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렇게 나는 사회생활 첫 발을 호구로 시작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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