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최애드라마는 <나의 해방일지>다. 넷플릭스의 그 수많은 드라마 속에서 이것만 보고보고 또본다.볼 때마다 꽂히는 대사가 다르다. 좋아하는 인물도 매번 달랐다.
그럼에도 내게 이 드라마의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손석구와 '추앙'이다.
컨셉이 거렁뱅이 인거 같은데. 왜 이리 멋진 것일까. 누가 대사를 저렇게 띄엄띄엄 여백의 미가 가득하게 친단 말인가.
추앙이라니. 어이없으면서도 묘한 이 느낌은 뭐지? 곱씹었다. 울림이 있었다.
지난달 간부님 지사 격려방문 때 격렬한 환영에 의미로 사용된 하트피켓에 "간부님 추앙합니다!'심쿵유발"이 등장하기 전까지.
"다른 애들은 그냥 학교 가다 집에 오면 놀러 나가기 바쁜데 얘는 그냥 바로 공장이야. 애들 아빠가 내가 만든 서랍을 보고는 눈을 흘기는데 얘가 만든 거는 두말 안 해. 손이 어찌나 야무진지.."
미정이는 언니와 오빠를 둔 막내이다. 나는 저 대사가 그녀가 왜 "단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라고 외치는지를 설명해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남매. 게다가 막내. 바쁜 부모님. 그녀가 사랑받기 위한 방식은 '착한 아이'었을까. 무조건적인 부모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상황. 스스로 쓸모 있음을 증명하고 사랑받기 위해 어린 미정이가 얼마나 애를 썼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팠다.
"날 추앙해요. 난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 개새끼 개새끼 내가 만났던 놈들은 다 개새끼. 그러니깐 날 추앙해요. 가득 채워지게""사랑으론 안돼. 추앙해요"
부모의 사랑으로 '채워지지 못한' 채 어딘가에서 나를'채워줄' 사람을 찾아 떠난다. 하지만 나도 너도 다 채워지지 못한 인간들이 충만한 세상에서 만나봐야서로 애정을 갈구하기만 할 뿐 상대를 사랑할 수 없다
"그런 넌 누굴 채워 준 적 있어?" 우리 구 씨의 일침.
우리는 누군가 뿅 나타나 무조건적으로 나를 사랑해 주길 바라지만 정작 나는 누구를 무조건 사랑할 수 없다. 네가 쏟은 정성만큼만 할게. 날 사랑한 만큼만 사랑할게. 말 잘 들으면 예뻐해 줄게. 부모가 한 사랑의 방식을 고대로 따른다. 미정이는 구 씨의 말을 듣고 깨닫게 된다.내가 먼저 달라져야 해. 그들은 서로를 지지하기 시작한다. 알코올 중독자인 구 씨에게 술을 끊으라 하지 않는다. 그냥 함께한다. 팀장에게 빠꾸 맞은 디자인 작업을 다시 하는 미정 옆에 구 씨는 그저 앉아 술을 마시며 기다린다.
육아서를 한참 읽을 때 부모님을 그리 원망했었다. 내가 이리 '착한 아이'로 커서 사는 게 힘들구나. 부모의 사랑을 한 껏 받은 아이는 행복하다는데 그래서 제 아이를 사랑하는 것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는데. 나는 그렇게 크지 못해 이리 육아가 어렵구나. 사랑받은 엄마가 아니어서 아이들에게도 미안했다.
그러나 모두 어렵던 시절, 애 둘셋은 다들 낳아 기르던 시절. 남들이라고 나와 다를까? 남편도 나랑 주구장창 싸우는 거 보면 별달리 큰 건 아닌 거 같은데. 다른 사람들도 저마다 물려받은 불행하나 쯤 가진 듯한데. 마냥 행복해 보이는 행복지원센터 소장님도 해방되고 싶다 하지 않던가!
유대인 수용소라는 비극적인 경험 속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내려 했던 빅터프랭클의 자전적인 이야기, 죽음의 수용소에서 그런 구절을 봤다.
인간이 시련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
어릴 적 어려움을 겪으면 커서도 삶에 어려움을 겪게 됨을 수많은 사례들이 말해준다. 나 또한 왜 불행한가, 왜 이런 어이없는 행동을 했을까에 대한 이해를 과거에서 찾곤 했다. 하지만 과거의 어려움이 그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충분히 슬퍼했다면 나를 충분히 이해했다면, 성인으로써 사랑으로 자신의 행동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미정은 선택했다. 추앙을 먼저 하기로. 구 씨가 떠났을 때도 미워하지 않고 추앙을 멈추지 않는다. 구 씨는 미정의 추앙과 지지로 변화의 첫발을 딛는다. 미정은 이제 스스로가 사랑스럽다. 구 씨를 추앙하며 스스로를 채워나가는 법도 깨달은 것일까?
드라마를 풀로는 4번. 무작위 발췌로는 무한시청한 후, 결국 추앙은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긴 했는데, 남편 사랑도 나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은데. 미정이보다 내가 더 어렵다. 내가 더 난코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