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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새우깡. 그 으른의 맛.

#커피도.

더운 날 출장이 길었다. 고단하다. 더위를 먹은 건가. 오늘 남편이 건들면 앙 물어버릴 테다. 퇴근길에 편의점을 들른다. 하이볼에 얼음컵, 블랙새우깡을 챙긴다. 워라밸 지키기용이다. 둘째 아드님을 위한 팝콘을 산다. 콜라도 하나 살까? 같이 '짠'해야 하니깐. 아 오해 마시길.  아드님은 우리집 으르신답게 건강에 해로운 과자는 안 드시므로 못 사다 드리는 거다.  


얼른 샤워하고 식탁에서 둘이 짠하고 냠냠 과자를 먹는다. 아들이 블랙 새우깡을 집어든다.

나는 그냥 새우깡이 좋은데.
먹지 마. 내꺼야.

왜? 엄마는 이게 더 맛있던데.
이건 써.  끝에 쓴 맛이 나.


쓰다고? 아 쓰네. 몰랐는데 쓴 맛이 난다. 쓴데 왜 더 맛있을까? 쓴 맛 때문에 오리지날새우깡보다 블랙이 더 맛있게 느껴지는 건가? 쓴데도 불구하고 다른 맛과 섞여서 더 맛있다고 느껴지는 건가? 아니면 나 쓴맛을 좋아하나? 하루에 세 번은 먹는 커피도 쓰고, 상추보다 쓴 맛있는 깻잎이 좋다. 맥주 소주도 다 쓰다. 왜 쓴 걸 좋아하지?


첫째 아이가 어릴 때 독감에 걸쓰다고 정평이 자자한 타미플루를 먹어야 했다.  아이스크림과 약을 약 91정도로 섞어 먹였음에도 아이는 기똥차게 쓴 맛을 느끼고 우왁 토해버렸다. 야생의 독이 보통 쓴맛을 가지고 있기에 본능적으로 쓴 맛을 피한다는 사실은 이미 육아하며 수차례 경험으로 확인한 바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쓴 맛을 싫어왜 본능을 거슬러서 쓴 맛을 찾는 걸까?혹시  죄책감을 덜기 위해 스스로에게 내리는 작은 벌인가 하는 생각이 스친다.


아이 키우는 엄마들 사이에선 지랄총량의 법칙이라는 비교적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한 개념이 있다. 애가 크면서 하는 지랄의 총량은 같기 때문에 아이가 곱고 얌전하게 큰다 하여 절대 자랑질이나 방심하지 말라는 거다. 갸가 사춘기가 허리케인 급으로 올 수도 있고 더 나아가 다 커서 엄마 품을 떠날 나이에 대형사고를 칠 수도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나는 인생의 쓴 맛의 총량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한다. 점을 보면 초년운, 중년운, 말년운이 있고 그 운이 다 좋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나쁜 시기에는 괴롭지만  그 기간 얻은 교훈을 발판 삼아 크게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좋은 시기에 교만으로 많은 것들을 잃는 사람들도 있다. 인생은 늘 굴곡이 있다. 인생 새옹지마라 하지 않던가.


일련의 생각 끝에 내 인생의 남은 쓴 맛이 어느 정도 일까 궁금해졌다. 그 쓴맛을 한 번에 쓰나미처럼  겪어내는 것은 생각만 해도 너무 무서우니  잘게 잘게 쪼개어 맞으면  원이 없겠다. 잘게 잘게 쪼개서 몇 개는 새우깡 블랙이나 소주나 커피로  좀 치환해 주면 안되나.  입에 쓰나. 인생에 쓰나. 매한가지 아닌가?


부럼을 깨물어 부스럼을 물리치듯,  줄기차게 마셔대는 커피 쓴맛이 내 인생의 쓴 맛을 물리쳐주면 좋겠다.

그게 아니라면 새우깡의 쓴 맛을 즐긴 오늘이 언젠가 만날 쓰디쓴 시절에, 입에 쓰나 인생에 쓰나 뭐가 다르냐   벌떡 일어날 시덥잖은 빌미가 되어도 좋고.

  

새우깡이  쓰네 써. 엄청 써. 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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