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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네 생각이고.

신혼집은 작은 빌라였다. 2층이었고 후미진 골목에 있어서 그랬는지, 가스배관을 타고 올라와 주방 창문으로 도둑이 들어왔다. 물론 우리 집에는 예물이랄 것도 없고 쌓아둘 현금도 없었기에 도둑이 들었다는 것을 퇴근하고도 한참이나 몰랐었다. 그러다 거실에 누워 티브이를 보던 우리 집 남자가 바닥의 카펫을 멍하니  응시하다 갑자기 건넨 말. 자기 신발 신고 거실에 들어왔어?


그랬다.  어마어마한 흙발자국이 분홍 카펫떡하니 찍힌 것을 보자마자 그는 나를 의심했다.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서 그리 말했을 거라 생각했지만 돌아보니 그때부터 나를 더러운 여자라고 여겼던 거 같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면 넌 그러니? 난 아닌데.라고 뚝심 있게 나갔어야 했는데,  그 당시에는 진하게도 그가  말하는 것이 청결함의 절대 기준이믿고는 그 기준에 맞추려 매우 성실하게 노력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남자는 흔들리는 나를 한껏 이용해서 가스라이팅을 시작했다.


설거지는 바로바로 해야지. 냄새나. 밥 먹고 바로해. 빨래도 맨날 해야지 안 그럼 빨래 썩어. 우리 집 봤지?  먼지 한 톨 없는 거.  가끔 어머니의 협공도 들어온다. 매일매일 먼지 닦아 줘야 돼.  걔가 비염이 있어서 먼지 날리면 안 된다고. 이불이랑 커튼도 자주 빨아주고.


없이 살긴 했지만 딸 둘 집 귀한 장녀로서 집안일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없었는데,  이 남자는 출근도 육아도 하는 내게 바라는 게 너무도 많았다. 그 기준을 못 맞추는 나를 '기본도 안된'더러운 여자 취급하면서. 문제는 그 얘기를 지속적으로 듣던 나도 스스로 그리 생각면서 습관적 자책을 시작했다는 데 있었다.


어느 아침, 소변을 누고  물을 누르지 않은 변기를 발견했다. 생각해 보니 수년동안 저 남자는 이런 습관이 있었다. 화장실  청소 하는 사람은 안다. 저렇게 소변 후 바로바로 물을 내리지 않으면 나중에 물이 찰랑찰랑한 선 그대로 누런 때가 낀다는 것을. 저런 더러운 습관을 화장실 청소도 안 하는 주제에 수년을 유지하다니. 갑자기 부르르 분노가 치민다. 그렇지만 난 배운 여자니까 꾹 참고 좋게 얘기해 본다. 다음 날 또 그런다. 한 번 참았으면 됐다. 그동안의 서러움의 한을 듬뿍 담아 소리를 버럭 지른다. 알고 보니 아버님 때부터 대대로 내려온 가족문화이다. 물을 아낀다나 뭐라나.


그렇다. 저 남자도 더럽다. 내 기준에서 저이 더럽지만 내가 참아주고 존중해 주련다. 그러니 더는 말자 가스라이팅. 네가 옳으면 나도 옳다. 세상에 절대 기준이 어딨 다고.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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