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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풍뎅이, 너는 어디가 낫겠어?

험하고 자유로운 세상 vs 배부르고 답답한 집구석

아들이 장수풍뎅이 애벌레인지 번데기인지를 집으로 가져왔다. 학교에 업체가 와서 곤충수업을 해주곤 선물로 주고 갔댄다. 아드님은 유치원 때부터 장래희망이 반려견행동전문가인 '강형욱'이 되는 것이지만, 남자 녀석 둘, 그의 애비 하나 만으로 인생이 충분히 벅찬 애미는 절대 강아지를 허락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인간을 제외하곤 유일하게 우리 집에 입장한 생명체가 장수풍뎅이었다.  

아들은 그저 장수풍뎅이의 사육통과 먹이인 젤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까짓 거. 쿨하게 사줬다.

맏이는 번데기일 때부터 성충이 될 때까지 잘 지켜보더니 설명서에 나온 대로 적당히 껍질이 말랐을 무렵 풍뎅이를 꺼내보였다.


내 첫 느낌은 뭐랄까. 음. 미국 바퀴 같달까? 짙은 갈색에 밤에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아무래도 대왕바퀴에 오버랩되어 영 별로였다. 그런데 녀석이 더 싫어진 건 어느 날 밤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 티브이나 볼까 하고 빈방이자 녀석의 거주지인 작은 방에 들어가 불을 켰다. 녀석은 곤히 자다 불빛에 놀랬는지 갑자기 나무막대에서 떨어져서 흙바닥에 배를 드러내고 누워선 난리방구를 끼며 허우적 대기 시작했다. 바로 뒤집어 줄 용기는 나지 않고 해서 조용히 불을 끄고 티브이만 살짝 킨 채로 녀석을 지켜봤다. 청각이 있나? 멍청한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티브이 볼륨도 줄였다. 한참 지나니 좀 조용한 걸 보니 도로 주무시나 싶었다. 아놔, 내가 장수풍뎅이 눈치도 봐야 하는 거냐고.


그놈이 맘에 안 드는 건 나뿐이 아니었나 보다. 깔끔 떠는 남편에게 장수풍뎅이는 눈엣가시였을 게다. 오래 참는다 싶었는데 아들을 불러다 놓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인테리어를 해야 해서 짐을 비워야 한다. 장수풍뎅이도 이제 그만 자연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냐. 걔도 자유롭고 싶을 거다. 풍뎅이의 자유까지 들먹이자 맏이는 맘이 약해져 그만 사육통을 들고 아빠를 따라나섰다.


빈 손으로 들어온 아들은 말없이 이부자리에 눕더니 갑자기 오열을 시작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바깥양반이 시작한 일이지만 위로와 수습은 나의 몫이다. 대화의 요지는 이러했다.


왜 그러나.

풍뎅이에게 미안하다.

뭐가.

따듯할 때 진작 놓아줄 걸 그랬다.

네가 데리고 있어 줘서 좋았을 수도 있지. 밥도 실컷 편히 먹고.

그래도 자유로운 게 좋을 수도 있다.

강아지는 자유롭게 다니면 들개가 된다. 들개는 좋을까?

아니. 그럼 데려와야겠다.

풍뎅이 죽을 때도 다되었다. 사람나이로 백 살인데 데려왔는데 금방 죽으면 더 슬프지 않겠냐. (도돌이표)


다시 곱씹어도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아이를 달래려니 설득이 안되었다. 그렇게 저녁에 자리 깔고 울더니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출근하는 내게 또 한번 전화해서 울어댔다. 슬프겠지. 그래도 그렇게 끝나나 보다 했다.


그러나 그날 오후 풍뎅이가 돌아왔다. 질긴 녀석.


못내 마음에 걸렸던 맏이는 하교하자마자 풍뎅이를 놓아준 곳에 달려갔고, 그 자리에 죽은 듯 꼼짝 않고 붙어있던 녀석을 데려오고야 말았다.


날이 벌써 추워졌고 우리 아파트엔 참나무가 없어서 밖에 두면 죽을 거 같아. 따뜻했을 때 진작 자유롭게 놔줬으면 좋았겠지만 이젠 늦었으니 그냥 내가 죽을 때까지 보살펴줄래.


저리 말하는데 뭘 어쩌겠는가. 그저 새로 곤충젤리를 새로 주문해 드렸다. 쿠팡 새벽배송으로.


몰래 훔쳐본 맏이의 일기는 오늘하루 생명을 대하는 숭고한 책임감에 대깊은 고찰로 점철되어 있었다. 풍뎅이 장례식까지 고민하는 이 녀석을 기특하게 생각해야 할지 걱정해야 하는 건지 몹시 혼란스럽다.


나참, 미국 바퀴 같은 놈에게 이럴일인가. 큰일날뻔 했다. 강아지를  안 데려온 과거의 나를 굉장히 특급칭찬 중이다.


그나저나 풍뎅이에겐 뭐가 나은 건가.


배부르고 따듯하지만 답답한 집구석 vs 춥고 배고프고 위험하지만 모험이 넘치고 자유로운 세상


못 고르겠다. 내 인생에서도 결정 못한 건데 니 인생이라고 판단이 되겠니?

<흙을 죄다 버려서 집꼴이 말이 아님. 좀만 참아라. 배송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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