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메밀꽃

늦여름 강원도 여행

by 본격감성허세남

바다에 한 번 가보지 못하고 여름이 흘러가는 것이 아쉬웠다. 그래서 8월의 마지막 주, 늦게나마 강원도로 여행을 다녀왔다. 목표는 단 하나, 바다를 보자! 수인이에게도 바다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수인이가 처음 바다를 본 건 2015년에 떠났던 제주도 여행에서였다. 6개월이 갓 지났던 상태에서 수월봉에 올라 넓디넓은 바다를 보여줬었다. 그 뒤로 1년 넘게 바다를 직접 체험할 기회는 없었던 것 같다. 이번에는 단순히 바라보는 것뿐 아니라 직접 놀아보게 하고 싶었다.


국내여행은 언제든지 부담 없이 떠날 수 있어서 좋다. 토요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선 후 강릉으로 향했다. 강릉에는 여러 해변이 있지만 우리의 선택은 경포대였다. 마침 그 근처에서 두부로 밥을 먹기도 했고, 강릉 하면 아무래도 가장 고전적이면서도 유명한 해변이 바로 경포대가 아닌가. 서울에서 강릉까지는 크게 밀리지 않고 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여행이 참 즐겁고 무난했더랬다.


이미 공식적으로 폐장을 한 경포대 해수욕장은 한산했다. 평화로운 백사장과 새파란 바다 곳곳에 드문드문 사람들이 조금씩 있었고, 다행히도 눈부시게 쨍쨍했던 하늘이 그 위에 펼쳐져 있었다. 어차피 수인이와 함께 하는 이상 바다에서 해수욕을 즐길 것도 아니니 오히려 폐장된 뒤의 이런 한산함이 우리 가족에게는 딱이었다.


"바다다! 수인아, 저기 좀 봐. 저기가 바다야. 물 정말 많지?"


사진 2016. 8. 27. 오후 1 52 25.jpg 수인이가 직접 경험한 첫 바다, 강릉 경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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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이 많은 우리 딸은 역시나 바다를 무서워했다. 처음 밟아보는 모래사장, 바람이 그리 강하지 않음에도 철썩철썩 들이치는 동해안의 파도. 그도 그럴 것이 수인이에게는 처음이었으니까, 우리에겐 너무나도 당연하고 보면 흥분되기도 하는 이런 풍경을 태어나서 처음 경험한 거니까. 비록 말을 못 하기에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얼마나 떨렸을지 생각하니 살짝 뭉클했다. 주저하던 수인이는 곧 조금씩 즐기기 시작했다. 바닷물도 살짝 경험해보고 엄마와 함께 모래사장을 거닐며 모래도 만져보고 하며 얼마 동안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그 후에는 주변을 산책하며 여기저기 구경도 했다. 안아달라고 보채면 안아주고, 다시 또 걷고 하는 과정의 반복. 수인이와 함께라면 그런 반복도 즐겁다.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낸 후 미리 잡아놓은 숙소로 이동했다. 피곤했는지 수인이는 차에서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그동안에 아빠와 엄마는 커피도 한 잔 하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내가 경험한 첫 바다를 기억하지 못한다. 반면에 각종 수단의 발전 덕분에 수인이는 본인의 첫 바다를 이렇게 잘 기억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이럴 땐 수인이가 말을 못 하는 것이 참 아쉽다. 만약 말을 했으면 얼마나 조잘조잘했을까, 얼마나 감탄을 했을까. 안에 담아두고 있을 그 말들이 궁금하고 아쉽다.


이제 활발해진 우리 딸은 숙소 이곳저곳을 마구 헤집고 다녔다. 침대에 올라서 데굴 거리다가 티브이에 매달려 놀기도 하는 등 굉장히 활발했다. 이전 제천 때보다도 훨씬 더 활발한 느낌. 또 컸구나 우리 딸. 예전에 독일에서처럼 수인이가 얌전하게 놀고 우리는 좀 더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함께 노는 것이 더 즐겁다. 아이와 함께 놀러 왔으면 모름지기 함께 놀아야 하는 법. 몸은 힘들지만 흐뭇한 저녁이었다. 창밖으로 지는 해도 아름다웠다. 우리의 여행을 축복하는 듯. 이때까지도 여행이 마냥 즐겁기만 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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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016. 8. 27. 오후 7 12 37.jpg 해질녘 하늘은 언제나 아름답다


둘째 날은 시작부터 첫째 날과 완전히 달랐다. 하늘은 우중충하고 비가 꽤 많이 내렸다. 기온은 급강하해서 추울 정도였다. 예비로 가지고 간 옷을 껴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인이가 감기에 걸리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는 그런 날씨였다. 서울로 돌아가는 도중에 봉평에서 밥을 먹고 메밀밭을 구경하기로 했다. 물론 날씨가 조금 좋아져야 한다는 전제는 있었다.


다행히 봉평에 도착했을 때는 비는 상당 부분 그친 후였다. 비가 오락가락하긴 했지만 덕분에 메밀밭은 여유롭게 즐길 수 있었다. 곧 메밀꽃 축제가 열릴 예정이었기에 메밀꽃이 만발한 상태라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수수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이랄까, 푸른 풀밭에 소금을 뿌려놓은 듯한 모습이랄까. 메밀꽃을 이렇게 가까이서 직접 보는 건 나도 처음이었는데 수인이는 벌써부터 접하다니 행운일세. 하긴 나는 20세 이후에나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가봤는데 수인이는 첫 돌 이전에 이미 독일에 다녀왔으니 말 다한 건가. 걷게 된 이후로 더 활발해진 수인이는 메밀꽃에서도 즐겁게 놀았다. 아이가 잘 놀면 아빠와 엄마는 그저 즐겁다.


"좋다, 그치?"

"응. 수인이가 잘 뛰어놀아서 더 좋아."

"저렇게 잘 걸을 거면서 왜 그렇게 늦게 걸었을까."

"한 번에 잘 걸으려고 그랬나 보지 뭐."


이때까지도 어쨌든 긍정적이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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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악몽이었다. 강원도의 도로들은 평창 올림픽 때문에 곳곳이 뜯겨 있어서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는데 비까지 내려 더욱 좋지 않았다. 그런 길을 뚫고 양평까지는 잘 왔는데 여기서부터가 문제였다. 벌초가 겹쳐서인지, 아니면 어떤 이유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차가 아예 움직이지를 않았다. 정체 정도가 아니라 그냥 말 그대로 주차장이었다. 명절 때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이 때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중간에 수인이가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 잠시 엄마와 밖에 나가서 걸어 다녔는데 그 어린아이의 걸음 속도보다도 자동차가 훨씬 더 느렸다. 아예 움직이지를 않으니 당연할 수밖에.


어떻게든 움직여 보겠다고 이런저런 내비를 다 동원해서 조금씩 움직이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중간에 아무 데나 칼국수 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가득했다. 덕분에 그 집은 최고의 호황을 맞아 재료가 다 떨어져서 뒤에 온 사람들은 칼국수조차 주문하지 못했다. 식당 여기저기에서는 왜 음식이 안 나오냐며 투덜대는 사람들의 소리가 나왔다. 밥 먹고 나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잠시 움직이나 싶더니 금방 또 서기를 반복. 결국 오후 3~4시경에 봉평에서 출발을 했는데 서울 집에 도착한 건 자정이 훨씬 넘어서였다. 양평에서 서울까지 100킬로도 안 되는 거리가 6시간가량 걸린 듯. 어른들도 이렇게나 지루하고 힘들었는데 수인이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악몽이었다.


바다로 시작해 메밀꽃을 지나 악몽으로 마무리된 여행. 우리 가족은 결심을 했다. 토요일에 출발해서 일요일에 도착하는 일정이라면 절대로 강원도에 가지 않기로. 분명히 일요일 오후까지는 즐거웠던 여행은 결국 가장 힘들었던 여행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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