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촉한 날씨 속 산책
아침 9시가 넘어서야 잠에서 깼다. 지난 하와이 여행 때는 다른 가족들도 있고, 일정도 있고 해서 늑장을 부리지 못하고 늘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그렇지만 대만에 와서는 어차피 우리뿐이고, 무언가 '해야 하는 것'이 없으니 마음껏 늑장을 부리게 된다. 여행을 왔으면 이렇게 빈둥대는 맛도 있어야지. 나이가 들면서, 그리고 수인이와 함께 다닌 이후에 더 강해진 그런 변화중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다. 어릴 때 혼자 다닐 때는 늘 부지런하게 움직였는데. 그런 변화가 오히려 좋다. 저녁에 사놓은 빵과 음료 등으로 가볍게 아침을 하고, 침대에서 잠시 수인이와 놀기도 하면서 여유 있는 아침 시간을 보냈다.
오늘은 무얼 해볼까 고민하다가 온천 마을인 우라이에 가기로 했다. 예전에 한번 갔었던 우라이는 걷기 좋은 곳이라는 이미지로 남아있다. 그렇다면 산책을 즐기는 우리 가족에게 딱인 곳이다. 다른 관광지들에 비해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아 여유 있기도 하고. 비록 이번 여행에서 온천은 못 즐기는 상황라 아쉽지만 산책만 해도 충분히 즐거울 것이라는 생각이다.
일단 늦은 아침 겸 점심은 먹어야 하기에 대만 대학이 있는 공관역쪽으로 향했다. 원래 밥을 먹고자 했던 곳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엄두가 안 나고, 다른 곳들은 11시부터 문을 열기 때문에 딱히 할 일이 없어서 근처의 대만 대학으로 향해봤다. 수인이가 뛰어놀기에 제격이라는 생각에 갔지만 캠퍼스 안에 의외로 굉장히 좋은 공원이 있었다. 나무도 무성하고, 사람도 우리밖에 없어서 분위기가 환상적이었다. 역시 산책에는 사람이 없어야 하는 법. 잠에서 덜 깬 듯했던 수인이는 그곳에서 마음껏 뛰어놀았다. 저 작은 몸에서 어떻게 저런 에너지가 나오는지 볼 때마다 신기하다. 더 어릴 때만 해도 나무나 풀들을 살짝 무서워하던 수인이는 이제 거리낌 없이 자연을 누비는 아이로 컸다. 왠지 뿌듯했다. 공부를 안 해도 좋으니 책이나 스마트폰보다는 이렇게 공원을 좋아하는 아이로 계속 자랐으면 좋겠다.
다른 곳들을 두고 일부러 공관역쪽으로 향했던 데에는 밥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예전에 한번 먹어보고 깜짝 놀라서 대만에 올 때마다 꼭 들리는 그곳, <천산딩>의 전쭈나이차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대학에서 시간을 좀 보내다가 다시 가니 오픈을 한 상황. 11시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각인데도 벌써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그럴 만도 하다. 이곳의 버블티는 지금까지 대만에서 먹어본 수많은 버블티 중에서도 압권이니까. 흔한 버블티라도 확실히 다르다. 직접 졸인 타피오카에 그냥 우유를 그대로 부어서 주는데 어떻게 그런 맛이 나는지. 한국에서도 가끔씩 그리운 그 맛을 드디어 다시 맛보게 되니 정말 감개무량했다. 대만에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부분이다. 우습게도 음료수 하나가 그런 힘을 가지기도 한다. 가격도 우리나라 돈으로 2천 원도 안 한다. 그게 그나마 오른 가격이다. 정말 축복이다.
"어떻게 이렇게 차이가 나지? 다른 곳이랑 대체 무슨 차이일까."
"타피오카를 잘 졸이나 보지. 배우고 싶다. 한국 가서 사업하면 정말 잘 되지 않을까?"
"그러게. 회사 그만두고 여기 와서 무릎 꿇고 가르쳐달라고 사정할까. 하하."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며 마음껏 그 순간을 즐겼다. 어차피 현실로 이루기 힘들지만 이런 사업 이야기는 우리 부부의 단골 심심풀이 소재다. 아빠 엄마만 맛있는 것 먹어서 미안하다 우리 딸.
배도 든든하겠다, 그리던 전쭈나이차도 먹었겠다, 이제 본격적으로 우라이로 향했다. 우라이 가는 길은 쉽지 않다. 지하철을 타고 종점까지 가야 하고, 거기서 버스로 갈아타고 또 약 40~50분 정도를 가야 한다. 우리 부부만 있다면야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겠지만 유모차를 접고 수인이를 안으며 가야 하기에 쉽지 않은 길. 그래도 수인이가 얌전히 있어줘서 생각보다는 수월하게 왔다. 졸린 눈을 참으며 깨어있는 수인이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졸리면 자면 되지 뭐 그렇게 호기심이 많은 거니.
우라이에 도착해서 유모차로 갈아탄 수인이는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덕분에 여유롭게 산책을 시작했다. 마을 입구의 시장 같은 곳을 지나니 곧바로 산책길로 이어지고 사람들은 점점 드물어졌다. 조금 더 걸어가니 양옆으로 무성한 나무들만 남게 되었다. 날씨는 비가 올 듯 말 듯 촉촉했다. 비가 오는 날씨나 습도가 높은 날씨를 참 싫어하는데 이렇게 나무가 많은 곳이라면 의외로 그런 날씨가 좋았다. 나무에서 나는 푸릇푸릇한 내음도 더 강하고, 왠지 온몸이 깨끗하게 씻어지는 느낌이랄까. 작년엔가 우라이는 심각한 태풍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시간이 꽤 지났지만 아직도 그 복구는 진행 중인 것 같았다. 마을 입구 쪽의 하천은 공사 중이었고, 우리가 탈까 하고 생각했던 미니 열차도 아직 운행 중이지 않았다. 어쨌거나 산책에는 지장은 없었다. 수인이는 잘 자고, 우리 부부는 한참 동안 걸었다.
드디어 우리의 목적지인 우라이 폭포에 도착! 산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폭포는 여전히 압권이었다. 산책길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 폭포 하나만으로도 우라이는 와볼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다. 멍하니 바라보게 만드는 그런 힘이 있는 곳이다. 말은 못 하지만 멋진 자연환경만 보면 감탄하기에 바쁜 우리 수인이는 이때까지도 자고 있었다. 일어나라고 깨워봐도 일어나지 않고, 나중에 놀려주려고 아빠 엄마가 동영상을 찍으며 말을 걸어봐도 일어나지 않았다. 분명 좋아할 텐데. 좋은 것을 보면 사랑하는 딸에게도 꼭 보여주고 싶은 것이 아빠의 마음인데. 어쩔 수 없다 생각하고 우리끼리 사진도 찍고 하면서 20분가량을 보냈던 것 같다.
다시 돌아가려고 삼각대를 정리하려는 찰나에 수인이가 눈을 떴다. 여긴 어딘가 하는 생각으로 얼떨떨해하던 우리 딸은 곧 눈앞의 폭포를 발견하고 "어, 어" 하며 감탄을 내뱉었다. 보통 자다가 깨면 후앵 하거나 하게 마련인데 눈앞에 이런 모습이 보이니 그럴 겨를도 없었나 보다. 연신 감탄을 내뱉으며 신기해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다. 함께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말을 할 수 있었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아빠, 여긴 어디예요? 와, 저 떨어지는 물은 뭐예요?"
이랬을까? 24개월이 훨씬 지났지만 아직 말을 못 하는 우리 딸. 말은 기가 막히게 알아들으면서 왜 말을 하지를 못 하니. 궁금하지만 물어보지 못하니 안타까울 따름.
우라이 마을로 다시 돌아와서 같은 코스를 거쳐 타이페이로 돌아왔다. 원래 우라이에 기대했던 건 봄에 어울리는 꽃과 무성한 녹음, 그리고 그 속을 걷는 산책이었다. 비록 꽃은 없었지만 대신 촉촉하고 상쾌한 기운은 마음껏 받은 것 같다. 우라이는 여전히 걷기 좋은 곳이었다. 서울이라는 도시 속에서 찌든 것들이 많이 씻어졌기를. 뒤에 안 사실인데 이날 서울의 미세먼지가 사상 최고치로 올라가 전 세계에서 나쁘기로 2위를 기록했다고 했다. 피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원래 봄을 참 좋아하는데 미세먼지나 황사 때문에 갈수록 봄을 즐기기가 어려워지니 슬프다. 수인이가 일상 속에서도 이런 상쾌함을 많이 느끼며 살아갔으면 좋겠는데 그런 기회가 점점 사라져 가는 것 같다.
저녁은 대만에 왔으니 딘타이펑! 딤섬도 한 세 종류 정도 시키고, 우육면도 시켜서 역시나 마음껏 먹었다. 지금 안 먹으면 언제 먹으리. 살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둬야지. 확실히 대표 맛집은 다르다. 대기 인원 관리부터 안내, 한국어 메뉴판, 음식 서빙까지 모든 것이 척척. 언제나 만족스러운 딘타이펑이다. 역시 대만에 오면 한 번쯤 먹어줘야 한다.
대만 대학 산책으로 시작해서 우라이 산책으로 끝난 날. 이렇게 많이 걸은 날은 조금 피곤하지만 기분은 참 좋다. 즐거운 피곤함이랄까. 그래서 걷기를 계속 즐기게 된다. 아마 다음에 대만에 또 와도 우라이를 선택하지 않을까? 그때는 온천까지 더하면 더 좋을 거다.
저녁을 먹은 후 돌아다니다가 괜찮은 찻집을 하나 발견했다. <Fong Cha>라는 브랜드였는데 신기하게도 냉침차를 팔고 있었다. 역시 차 문화가 매우 발달한 대만다운 모습이다. 'Honey Flavor Oolong Tea'를 사 보았다. 꿀 향이라니. 클래식 우롱차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조금 신기한 조합이라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사 와서 숙소에 온 후에 마셔봤는데 엄청났다. 좋은 우롱차에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향에 냉침 특유의 상쾌함이 더해지고, 거기에 은은한 감미로움이 살짝 감싸주니 눈이 번쩍 뜨이는 맛이었다. 아, 좋다. 그저 이 말밖에. 다른 무슨 말이 필요하랴. 훌륭한 우롱차로 마무리된 대만스러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