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도 부정도 모두 홍콩의 모습
결혼한 해였던 2013년 12월에 아내와 함께 둘이서 홍콩에 왔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며 다시는 홍콩에 오지 말자, 차라리 여행을 갈 거면 다른 곳에 가자고 이야기를 했었다. 날씨가 가장 좋다는 12월에 갔음에도 불구하고 3박 4일 내내 해 한 번 볼 수 없었을 정도로 날씨 운이 없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너무 혼잡해서 우리 취향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에 4년 만에 홍콩에 다시 다녀왔다.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다. 처남, 그러니까 수인이 외삼촌이 홍콩에서 가까운 중국 선전에서 유학을 하게 됐기에 처남도 만날 겸 해서 홍콩으로 갔다. 수인이는 외삼촌을 좋아한다. 그런 외삼촌이 중국으로 떠나버려서 자주 못 보니 얼마나 서운했을까.
오랜만에 해외여행이다. 2월에 대만에 다녀온 뒤로 처음이다. 그동안에 수인이는 또 엄청 컸기에 혹시 이제는 비행기를 잘 못 타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되기도 했다. 여전히 말은 느리지만 단어들은 잘 말하고 자기 의사 표현은 분명한 우리 딸.
"수인아 아빠 엄마랑 비행기 타러 가자."
"아냐. 아냐."
이래서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수인이는 공항 보안 검색대가 가장 큰 난관이다. 이번에도 검색대에서 아저씨가 수인이 손에 들고 있었던 폴리 장난감을 잠깐 뺏었다고 얼마나 서럽게 울던지. 그것만 빼고는 매우 순조롭게 홍콩에 도착했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공항에 와서 피곤했는지 이륙 후 얼마 되지 않아 잠에 든 우리 딸. 이후에 일어나서도 요즘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인 폴리펜으로 노래를 들으며 한 번도 울지 않고 착륙까지 성공했다. 착륙 후에 비행기에서 빨리 나가겠다고 소리를 살짝 지른 건 옥에 티지만. 우리 효녀, 역시 여행 체질이다. 기특한 것.
이번 홍콩은 날씨가 정말 좋았다. 습도도 높지 않고, 기온은 오후에 21~22도 정도라 가벼운 긴팔 티셔츠 하나 입고 다니면 딱 좋은 날씨였다. 역시 날씨 요정 수인이! 수인이와 여행을 다닌 뒤로는 악천후였던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한국은 영하의 날씨였는데 불과 3시간 넘게 비행을 했다고 이렇게나 다른 날씨라니, 수인이도 뭔가 어안이 벙벙했을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그런 것 상관없이 우리 딸은 어디서든 웃으며 활발하게 잘 논다. 공항에서도, 기차 타고 숙소로 가는 길에도, 칭얼대지 않고 잘 놀아줘서 고맙다.
미리 예약해놓은 숙소로 수인이 외삼촌이 직접 왔다. 시크하게 외삼촌을 맞이한 우리 딸은 숙소가 마음에 드는지 아주 신이 났다. 에어비앤비에서 예약한 숙소인데 Sea-view Masion이라는 이름답게 경치가 기가 막히게 좋았다.
"바따, 배."
"에뻴."
이러면서 수인이는 한참 돌아다녔다. 창밖에 바다와 배가 있고, 벽에는 에펠탑 그림이 있다는 뜻이라는 걸 우리는 안다. 비록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말이 확연히 느리지만 이렇게 다 아는 걸 보니 기특하다. 어느새 많이 컸구나. 이것만 해도 격세지감이다.
숙소에서 나와 수인이 외삼촌과 함께 본격적으로 홍콩 탐방을 시작했다. 우리 숙소가 있는 셩완 지역부터 소호 쪽까지 걸어갔다. 홍콩은 여전했다. 길은 좁고, 사람은 많고, 차도 많고. 처음에 홍콩에 왔을 때 우리가 가장 싫어했던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다. 쇼핑보다는 걷기를 좋아하는 우리 부부에게 홍콩은 최악이었다. 자꾸 부딪치고, 특히 센트럴의 보도는 전부 공중에 떠 있고, 게다가 당시에는 비까지 왔었으니 얼마나 별로였겠나. 이번에는 비록 비는 안 와서 상대적으로 덜 붐볐지만, 여전히 걷기에는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더 안 좋은 점은 바로 담배. 거리 곳곳에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있는데 담배의 위치가 딱 수인이 머리 근처다 보니 자꾸 신경 쓰게 되고 빨리 지나가게 됐다. 아이 데리고 걷기에 홍콩은 최악이다. 어쩔 수 없이 싫다는 유모차에 수인이를 자주자주 태워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홍콩 특유의 주말 풍경, 즉 수많은 가사도우미들이 거리에 나와서 박스를 깔고 앉아서 밥을 먹거나 춤을 추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모습도 여전했다. 처음에는 이 모습이 굉장히 충격이었다. 그래서 대체 왜 그런지 찾아보고 했었지. 이제는 알고 있음에도 자꾸 거슬렸다. 통행이 불편한 건 둘째 치더라도, 마음이 불편했다. 수인이가 만약에 말을 잘 했다면 뭐라고 했을까? 그럴 때 나는 뭐라고 해야 하나. 자세히 알려주는 게 맞으려나? 홍콩의 많은 학생들은 이 모습을 어떻게 보고 크는지 궁금했다. 나라 간 극심한 빈부격차가 사람에까지 이어져 벌어지는 이런 기상천외한 모습이 어떻게 비칠까? 왜 수많은 사람들이 휴일에 거리에 나앉아서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지. 그들이 실제로 어떻게 느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개 여행객에게 유쾌하지는 않은 광경이다.
그래도 확실히 '도시'라는 면에서 본다면 홍콩은 즐길 것이 많은 곳이긴 하다. 홍콩에 있으면서 정말 자주 드나든 IFC몰, 특히 그중에서도 시티 슈퍼는 쾌적하게 쇼핑하며 수인이가 좋아하는 많은 것들을 살 수 있었다. 엄청 높은 건물들과 옛날 건물들이 함께 모여 만들어내는 특이한 풍경도 즐기고,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에스컬레이터도 타보고, 어디서도 맛볼 수 없었던 고퀄리티의 이탈리안 음식과 훌륭한 맥주도 먹고! 물론 돈이 많이 든다. 홍콩의 센트럴 중심부는 물가가 특히 비싸다. 그래도 기왕에 여행 온 거, 지불을 한다면 큰 만족도를 주는 곳. 수인이도 신기한지 계속 두리번두리번거리며 구경을 했다.
"수인아 홍콩은 어때?"
"(노래) 용감한 구조대 로보카 폴리!"
물어봐도 폴리펜 노래 듣느라 바쁜 우리 수인이. 그러고 보면 유럽의 도시부터 일본, 하와이, 대만, 홍콩 등 많은 곳들을 봤을 텐데 여기는 어떻게 느낄까? 궁금할 따름이다.
숙소로 돌아갈 때는 일부러 한적한 바다 쪽 길을 골랐다. 아무리 센트럴이라 하더라도 도심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조용하다. 바다 너머로는 구룡반도의 고층 건물들이 서 있고, 뒤로는 IFC몰의 멋진 야경이 펼쳐져 있다. 이런 풍경을 보며 하는 밤 산책의 맛은 일품이다. 비록 공기가 그렇게 좋지는 않고, 길을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를 찾거나 공중 보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찾느라 힘들긴 하지만. 유모차를 가지고 다니자니 어려움이 많지만 그래도 여행을 떠나오니 그런 것들이 너그럽게 용서됐다. 불평해서 무엇하리. 좋은 것만 보고 마음 편하게 다녀야지.
얼마나 열심히 돌아다녔는지 숙소에 돌아온 후 수인이는 금방 잠에 들었다. 물론 숙소에 와서도 창밖 야경을 한참 바라보기도 하고, 침대와 소파 사이를 돌아다니며 엄청 설치긴 했다. 그렇게 설치니 금방 잠들 수밖에. 수인이를 재우기 위해 방에 불이 모두 꺼지니 창 밖 야경이 더욱 돋보였다.
예전에는 숙소의 뷰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호텔을 고를 때도 오션뷰보다는 상대적으로 좀 더 저렴한 시티뷰를 고르곤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좋은 뷰의 숙소에서 묵어보니 단순히 바라보는 것이긴 하지만 뷰가 생각보다 큰 역할을 하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됐다. 일단 수인이도 엄청 좋아한다. 좋아할 때 나오는 특유의 "아! 아!"하는 하이 소프라노의 고음을 지르기도 하고, 창에 붙어서 한참 바라보기도 하니 그 모습이 또 어찌나 귀여운지. 수인이가 완전히 잠든 후에 일어나서 창밖을 보며 맥주를 한 잔 했다. 홍콩 맥주인데 그 자체로 특별히 맛있지는 않았지만 야경을 바라보며 마시는 그 운치가 상당했다. 숙소의 뷰는 좋은 것이구나. 앞으로 다른 데 가도 가격 차이가 크지 않다면 기왕이면 좋은 뷰가 있는 숙소에 묵어야겠다.
홍콩에 무사히 도착했고, 첫날도 무사히 보냈다. 언제나 시작이 가장 어려운 법인데 이번 여행의 시작은 좋았다. 수인이가 이렇게 건강하게 다닐 수 있는 것이 당연한 건 아니다. 비록 무교지만 누구라도 내 감사를 듣겠지 하는 마음으로 모두에게 감사를 표시한 후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