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서의 한적한 주말
둘째 날, 점심을 먹은 후 수인이 외삼촌이 중국의 선전에 있는 학교로 돌아갔다. 수인이는 외삼촌이 간 게 아쉬웠는지 아쉬운 마음을 듬뿍 담아 IFC 몰에서 기저귀에 큰 응가를 했다. 밖에서 응가를 하면 치우기가 애매한 경우 가 많은데 IFC몰 같은 쇼핑몰에는 기저귀 갈이대도 잘 되어 있어서 금방 갈 수 있었다. 도시의 좋은 점이랄까. 확실히 이런 점은 도시가 편리하다. 수인이는 이제 제법 말도 한다. 응가를 하고 나서는 "응가" 하고 말한다. 응가를 하기 전에 말을 하면 기저귀도 떼고 좋으련만... 말도 늦고 기저귀도 늦게 떼는 우리 딸, 그래도 예쁜 우리 딸. 건강하게 응가 잘 하는 게 최고다. 딸바보는 어쩔 수 없다.
오전 내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외삼촌과의 마지막 시간을 즐겁게 보낸 우리 딸은 응가를 한 후 곧 잠에 빠져들었다. 웬일로 활짝 웃으며 애교를 떨며 사진도 찍더니 피곤했나 보다. 수인이도 재울 겸 잠시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다음 계획을 짰다. 이제 우리만의 시간, 그럴 땐 역시 공원이다. 홍콩에 적당한 공원이 없을까 하고 찾아보다가 어제 걸어가다가 잠시 지나쳤던 동물원이 생각났다. 동물원과 식물원이 같이 있는 곳인데 찾아보니 가격도 무료! 산책도 할 겸 수인이가 일어나면 걸어서 동물원에 가기로 했다.
유모차를 끌고 엄청난 경사를 계속해서 올라가야 했기에 입구까지 가기는 참 힘들었지만 홍콩 동물원은 의외의 멋진 발견이었다. 무료라 그런지 동물이 많지는 않았다. 원숭이 몇 종류와 새들, 거북이 정도. 하지만 사람이 많지 않아 쾌적하게 산책을 할 수 있어서 무척이나 좋았다. 조경도 꽤 잘 되어 있어서 기분이 좋은 건 덤. 신기한 게 한국 동물원과 달리 여기의 원숭이는 엄청 활발하게 우리 안을 돌아다녔다. 팔을 뻗어서 여기저기 날아다니기도 하고, 먹이를 먹기도 하고.
"수인아 저기 원숭이 봐봐. 뭘 먹고 있네."
"어, 수인아 원숭이가 너 보고 있다."
이러면서 계속 보여줬더니 수인이는 원숭이를 한참 동안 구경했다. 새는 가까이서 보니 무서웠는지 피하더니 원숭이는 한참 구경하더라. 그런데 재미있는 게 여기서 뭔가 트라우마 비슷한 것이 생긴 모양이다. 이후에 손에 있는 걸 놓지 않으려고 떼를 쓰고 소리를 지르길래 "원숭이가 가져간다. 엄마가 가지고 있을게." 했더니 신기하게도 바로 손에 있는 걸 놓았다. 더 재미있는 건 한국에 와서도 그게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인이가 가끔 소리를 지르고 떼쓸 때마다,
"너 소리 지르면 원숭이 아줌마에게 데리고 가라고 전화한다!"
했더니 금방 그치곤 한다. 안 그쳐서 실제로 전화를 하면(아빠 전화로 엄마에게 또는 집 전화에게) 기겁을 하며 울고 곧 그친다. 원숭이가 재미있긴 했는데 무서웠나 보다. 하하. 홍콩 동물원 덕분에 수인이 떼를 조절할 만한 수단이 생겼다.
공원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면 왠지 진짜 주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인이가 흥분하며 좋아하는 분수도 보고, 꽃밭 앞에서 가족사진도 찍고, 잡아라 잡아라 놀이하며 뛰어다니고 하다 보니 문득 "아, 평화롭다." 하는 말이 나왔다. 주말이라는 말에 딱 어울리는 편안한 주말. 홍콩에서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었는데. 그래서 더 좋았나 보다. 의외의 시간을 보낸 터라.
옆에서 아이에게 비눗방울을 불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수인이는 한참 신나 하며 함께 비눗방울을 따라다니며 놀았다. 아이들은 세계 어딜 가나 자연스럽게 함께 논다. 그리고 그걸 그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 비눗방울을 왜 다른 아이가 와서 함께 놀지 하는 말도 당연히 없다. 어른은 못하는 그것, 가끔 이렇게 순수하게 즐거운 표정으로 함께 놀 수 있는 우리 딸이 부럽다. 어른들은 술집에 가면 가능하려나. 확실히 커갈수록 벽이 점점 더 많아진다.
저녁을 먹으러 구룡반도 쪽으로 넘어가서 더 많이 올라갔다. <원 딤섬>이라는 유명한 곳인데 저녁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많아서 포기할까 하다가 기다리기로 해서 결국 먹었다. 그런데 안 먹었으면 어쩔뻔했나! 특히 새우야채딤섬이 환상적이었다. 수인이가 먹을 치킨 덮밥에, 딤섬 4종류에 새우야채딤섬은 특별히 2판을 먹었는데도 가격이 불과 151 홍콩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21000원 정도. 물가가 비싼 홍콩이라도 센트럴만 벗어나면 이렇게 저렴하게 먹을 수 있다. 점심으로 먹은 딴딴멘과 일본 라멘만 하더라도 3개에 음료까지 해서 600 홍콩 달러가 넘었는데... 참 신기한 곳이다. 서울 같은 대도시지만 지역 내 격차가 서울보다도 더 큰 것 같다.
마지막으로 침사추이에서 야경을 보기 위해 이동하다가 'Peninsula Hotel'의 야경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낮에는 몰랐는데 밤에 보니 그 위용이 엄청나고, 산타와 썰매 장식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었다. 괜히 수인이에게 물어봤다.
"수인아, 나중에 커서 돈 많이 벌면 아빠 엄마 저기 묵게 해줄 거야?"
대답 없는 우리 딸. 보통 무슨 말이라도 하긴 하는데 아무 답이 없는 걸 보면 싫은 건가 싶기도... 본인에게 불리하다는 걸 벌써 아는 건가.
홍콩에서의 둘째 날 마무리는 야경! 홍콩의 야경은 정말 멋지다. 흔히 말하는 백만 불짜리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야경 하나만큼은 일품이다. 처음에 홍콩에 왔을 때도 홍콩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야경 하나만큼은 감탄을 하고 봤었는데, 그 매력은 여전했다. 우리는 야경을 '반짝반짝'이라고 한다. 수인이도 야경이 흥미로운지 "어, 어" 하면서 감탄을 하면서 봤는데 특별히 어느 한 건물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수인아 어떤 건물이 제일 예뻐?"
하면 그 건물을 찍길래 처음엔 그냥 대충 찍은 줄 알았다. 그런데 자리를 옮겨서 여러 번 물어봐도 꼭 그 건물을 찾는 걸 보고 그냥 찍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이제 생각이 확실하게 생겼구나. 더 대견했던 건 배였다. 불과 얼마 전에 거제도에 놀러 갔을 때 악몽 같은 경험을 선사했던 배였기에 스타 페리를 탈까 말까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다. 그래도 한 번 시도해보자고 결심한 후 타기 전까지 '버스' 타는 거라고 여러 번 말해주고 탔는데, 의외로 타고나서 아무 소란 없이 잘 도착했다. 배도 크고, 날씨도 좋아서 출렁이지 않아서인가. 거제도 때는 사실 뱃멀미를 했던 건가. 배를 타고 가면서 홍콩의 야경을 마음껏 즐긴 우리 딸. 내려서 잘 했다고 박수를 짝짝 쳐줬다.
옛날부터 수인이가 유튜브에서 보는 '세계의 도시 풍경'이라는 동영상이 있다. 거기에 우리가 본 홍콩의 야경이 그대로 나오는데, 홍콩에 다녀온 뒤로 그 동영상에 홍콩이 나오면 수인이가 손짓을 하며 아빠 엄마를 찾는다. 보라고, 저기 우리가 간 곳이라고.
"저거 누구랑 봤어?"
"엄마 아빠."
"뭐 타고 봤는데?"
"배."
하면서 박수를 짝짝 치는 우리 딸. 아이도 나름 다 기억을 하나 보다. 그 기억이 얼마나 갈지, 나중에 생각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헛되이 시간을 보낸 건 아닌 것 같아서 괜히 뿌듯했다. 둘이서만 왔을 때의 홍콩과 아이와 함께 왔을 때의 홍콩은 같은 곳이지만 느낌은 이렇게나 다르다. 자유롭기는 둘이서 왔을 때가 훨씬 더 자유롭지만, 둘 중에 언제가 더 좋냐고 물어본다면 단연코 지금을 말하겠다. 갈수록 여행에서는 장소보다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