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에 온 이유
새벽 3시에 아이들이 깼다. 비행기에서 많이 자고, 현지 시각으로 좀 이른 저녁에 자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역시 시차 적응이 아직 안 됐나 보다. 억지로 억지로 다시 재웠지만 결국 6시에 우리 모두 깼다. 덕분에 이날 하루는 엄청나게 길었다. 창밖을 보니 날씨가 참 깨끗하고 하늘도 예쁘다. 일찍 일어난 덕분에 이런 평화로운 모습을 보게 된 건 긍정적인 부분이다. 비로소 여행을 왔다는 실감이 났다. 서울에서는 이런 여유가 어렵다. 사실 조금 일찍 일어나면 얼마든지 누릴 수 있지만 그 '조금 일찍'이 어렵다. 왠지 마음이 바쁘기도 하고.
마땅히 할 것도 없던 참에 어제 물을 사 오다가 집 바로 앞에 있는 놀이터를 발견한 것이 기억났다. 아내가 원영이 분유도 먹이고 이것저것 하는 동안 나랑 수인이는 놀이터로 향했다. 이로써 바르셀로나의 첫 일정은 놀이터가 된 것이다. 아이와 함께 하지 않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일정이다만 이제는 익숙하다. 세계 어디를 가나 수인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그 어느 곳보다 바로 놀이터니까.
평범한 집 앞 놀이터인데 분위기가 참 좋았다. 근처에는 이름 모를 노란 꽃들이 잔뜩 떨어져 있고, 작은 미끄럼틀과 시소와 그네가 있는 놀이터. 규모로 보나 시설로 보나 특별히 좋은 놀이터는 아닌데 바르셀로나 집 바로 앞에 이런 놀이터가 있다니 그것 만으로도 충분했다. 바르셀로나에는 이런 놀이터가 곳곳에 많았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같은 굉장히 유명한 관광지 근처에도 놀이터가 있었다. 일단 놀이터가 있으면 수인이를 조금이라도 달랠 수 있고 잠시 쉴 수도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바르셀로나는 벌써 세 번째인데 이전에 나 혼자 왔을 때는 그런 것을 전혀 몰랐는데 아이와 함께 오니 이런 놀이터들이 곳곳에 보였다. 역시 사람은 상황에 따라 보이는 것도 참 다르다.
수인: (경찰관 톤으로) 어디에 도둑이 나타났나요?
나: 미끄럼틀에 도둑이 나타나서 훔쳐가려고 해요!
수인: (미끄럼틀로 간 후에) 샤샤샤샥. 됐다. 어디에 도둑이 나타났나요?
이런 도둑 놀이를 수인이와 한참 했다. 수인이가 최근에 한참 빠져 있는 놀이다. 정작 파리만 봐도 무서워하는 녀석이 상상으론 못하는 게 없다. 요즘엔 상황극도 하고 때론 깜짝깜짝 놀라는 어른스러운 말도 하는 우리 딸, 언제 이렇게 컸니.
숙소로 돌아와서 가볍게 아침을 먹은 후 사그라다 파밀리아로 향했다. 우리가 바르셀로나에 온 이유. 처음에 여행지를 정할 때 아내가 꼭 보고 싶다고 했고, 그래서 그 많은 도시 중에 바르셀로나를 선택했으니 가장 먼저 보러 가야지. 숙소에서 15분 정도 걸린다기에 천천히 걸어갔다. 원영이는 유모차에 타고, 수인이는 걷고. 중간에 수인이가 좋아하는 바게트도 하나 사주고(엄청 맛있었다!), 힘들어요 업어주세요 하는 수인이의 칭얼댐을 조금 견디며 실제로는 25분 정도 걷다 보니 드디어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눈 앞에 나타났다. 와, 그저 감탄뿐. 예전에 봤었지만 굉장히 새로웠다. 쾰른 대성당이 그랬듯이 멋진 작품은 한두 번 본다고 질리지 않는다. 나와 아내와 심지어 수인이도 한참 동안이나 바라봤다. 물론 원영이는 유모차에서 쪽쪽이나 빨고 있었다.
"성가족 대성당! 멋지다!"
바르셀로나에 오기 훨씬 전부터 사그라다 파밀리아 사진을 수없이 봐온 수인이는 보자마자 감탄을 내뱉었다.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여행을 하도 많이 다녀서 그런지 수인이는 평소에도 여행책을 많이 보고, 유튜브로도 풍경 사진을 보고, 자신이 다녀온 예전 사진들도 많이 본다. 2017년 12월에 다녀온 홍콩 여행부터는 확실히 기억도 한다. 이게 조기교육의 힘인가. 바르셀로나에 다녀온 후에 여러 사람들이 뭘 봤냐고 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게 사그라다 파밀리아인 것을 보면 확실히 인상적이긴 했나 보다. 원영이도 아마 수인이처럼 그럴 거라고 믿는다.
하나 옥에 티라면 가족사진. 삼각대를 가져오지 않아서 부탁했는데 영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그래도 일찍 온 덕분에 사람이 상대적으로 별로 없는 시간에 여유롭게 구경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그 후로도 가기 전까지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여러 번 다시 왔다. 스쳐 지나기도 하고, 일부러 오기도 하고. 숙소가 근방이라 다행이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 볼 수 있을 때 많이 봐 둬야지.
원영이는 밖에 나오는 걸 좋아하는 게 확실하다. 실내에 들어가면 칭얼대는데 밖에 나오면 곧 얌전한 걸 보면. 얘도 여행 체질인가. 방긋방긋 웃으며 잘 있는 걸 보면 컨디션이 좋은가 보다. 무슨 생각을 할까? 아니, 여기가 서울이 아니라 다른 곳이라는 걸 알기는 할까? 독일 때 어땠는지 수인이에게 물어보면 전혀 기억을 못 한다. 참 궁금한 아이들의 생각. 아빠 엄마 때문에 고생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가도 이렇게 잘 노는 걸 보면 안심이 된다. 그래, 너도 즐겁겠지 뭐. 그렇게 믿고 남은 기간 동안에도 열심히 돌아다녀 보자꾸나.
원래 점심을 먹고 람블라 거리 쪽으로 갈까 했는데 바다 가자고 자꾸 졸라대는 수인이 때문에 계획을 급 변경해서 바다로 향했다. 바르셀로나의 햇빛은 뜨겁다. 기온은 30도가 조금 안돼서 많이 뜨겁진 않은데 햇빛이 무척이나 뜨겁다. 날씨 앱에 자외선이 '위험'이라고 나오는 건 처음 봤다. 그런데 바다라니. 걱정이 되긴 했지만 가자고 계속 조르는 우리 딸을 어떻게 이기리. 큰 마트에 가서 이후에 우리가 먹을 식료품들을 잔뜩 사서 집에 가져다 놓은 후에 바다에 갈 준비를 해서 버스를 타고 바다로 향했다.
바르셀로네타 해변에 도착하니 날씨는 참 맑은데 바람은 불어서 파도가 은근히 치고 있었다. 눈부신 바다! 처음에 바르셀로나에 왔을 때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바르셀로나가 참 좋았던 점 중에 하나가 바다였다. 이곳엔 모든 것이 다 있었다. 건물, 바다, 축구, 음식, 밤문화 등등. 서유럽의 다른 도시들과 다르게 늦게까지 깨어있고 활발한 바르셀로나. 여름에 오니 바다에 사람들까지 가득해서 더 활기가 넘쳤다. 원영이도 신기한지 바다를 보며 소리를 내더라. 그러고 보면 원영이는 처음 보는 바다가 여기다. 한강은 여러 번 봤지만 본격적인 바다는 처음이니. 이 녀석 처음으로 바르셀로나의 바다를 보다니 대단한데. 아빠 엄마에게 나중에 고마워 하렴.
엄청 기대하며 잔뜩 놀 것 같던 수인이는 물이 차가운지, 아니면 바다가 무서운지 금방 나왔다. 발만 담그고 파도 따라 4~5번 정도 도망치고 들어가고 했으려나.
"아빠 이제 집에 가자."
"(응? 이렇게 빨리?) 그래. 재미있게 놀았어?"
"응 재밌게 놀았어."
이렇게 물놀이는 싱겁게 끝나버렸다. 그동안에 원영이는 맘마를 다 먹었다. 햇빛이 뜨거워서 걱정했는데 오히려 다행이다. 그 뒤로 바다 가자는 말을 다시는 안 한 걸 보면 충분했나 보다. 수인이는 더 평화로운(?) 제주도 바다를 좋아하는 것 같다.
집에 오는 버스에서 수인이는 잠들었다. 원영이도 집에 와서 곧 잠에 들었다. 덕분에 매우 평화로운 저녁 시간이 찾아왔다. 보기 드물게 평화롭고 고요한 시간. 애들은 잘 때 가장 예쁘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오전에 사그라다 파밀리아 가며 봤던 알랭 피자라는 곳에 가서 피자를 사 와서 저녁으로 먹었다. 우와, 정말 맛있다. 도우와 토핑과 적절한 짠맛까지 완벽하다. 살면서 먹어본 피자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였다.
샤워도 깨끗하게 하고, 저녁도 맛있고, 애들은 자고. 아, 이것이 바로 행복이로구나! 그런데 6시부터 잔 애들이 아무리 해도 안 깬다. 시차 적응 걱정은 모르겠다. 그럼 우리도 자야지 뭐. 그리고 애들이 새벽에 깨면 또 같이 깨야지 뭐. 어차피 특별히 할 일도 없으니.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런 여유와 대책 없음, 정말 여행을 떠나오긴 했구나. 이 여유로움이 앞으로 약 2주간 계속된다고 생각하니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