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행운

시차 적응 덕분에 생긴 여유

by 본격감성허세남

오늘도 새벽 4시 즈음에 아이들이 깼다. 최초 깬 시각이 어제보다 1시간 늦어졌으니 다행인 건가. 시차 적응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럴 줄 알고 아빠 엄마도 어제 일찍 잠에 들었지. 그래도 새벽 4시는 너무한 거 아닌가. 다시 재워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잘 것 같지 않아서 그냥 포기하고 놀고, 씻고, 빈둥거렸다. 아침밥까지 다 먹었는데도 7시도 안 된 시각. 전날 자기 전에 이런 대화를 했었다.


"내일도 애들이 일찍 일어나면 뭐 하지?"

"글쎄."

"일출이라도 볼까?"

"한국에서도 안 보는 일출을 스페인에 와서?"


그런데 정말 일출을 볼 수도 있는 시각이라... 일출 장소를 찾다가 구엘 공원을 보게 됐다. 원래 유료인데 아침 8시 전에 입장하면 무료라는 소식. 정말인가 싶어 공식 홈페이지까지 찾아봤는데 무료라는 말은 없고 매표소 오픈을 8시부터 하는데 그 전에는 그냥 들어갈 수 있는 걸로 보였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구엘 공원에 가게 됐다. 이런 혜택은 누려야 한다.


사진 2019. 6. 26. 오후 2 30 08.jpg 구엘 공원 전망대에서 바라본 바르셀로나 모습


정말 무료였다! 게다가 엄청 좋았다! 전에 나 혼자서 처음 왔을 때는 겨울이라 사실 조금 휑했다. 그런데 여름에 오니까 곳곳에 꽃도 피어있고 날씨도 훨씬 좋고, 게다가 아침 해가 뜬 직후라 이제 막 퍼지는 햇살이 참 기분이 좋았다. 놀이터가 아니면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수인이도 보자마자 신나서 여기저기를 엄청나게 뛰어다니고 원영이도 뭐가 좋은지 계속해서 소리를 냈다. 하긴 그럴 수밖에. 그 사람 많다는 구엘 공원을 이렇게 여유 있게 봤으니. 사진 찍으려면 줄 서야 한다는 도마뱀, 전망대 등도 그냥 바로 즐길 수 있었다. 줄은 무슨. 여행에서 그 이후에 갔던 어느 곳보다도 평화롭고 아름답고 좋았던 곳이 구엘 공원이었다.


사진 찍는 시늉에 재미가 들린 수인이는 계속해서 아빠 엄마를 찍어댔다. 물론 카메라는 없다. 손으로 시늉을 할 뿐이다.


"엄마 여기 서봐봐. 아빠도 와서 서."

"(입으로 소리를 내며) 찰칵찰칵. 다 됐다! 잘 나왔어 봐 봐."


어쩌다가 아내가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보며 이거 잘 나왔다 그러면 옆에서 "수인이가 찍은 게 더 잘 나왔거든" 이러면서 참견을 한다. 귀여운 것. 참 별걸 다 배우고 따라 한다. 올해, 그러니까 한국 나이로 6살이 되면서 갑자기 부쩍 큰 우리 딸. 옆에서 그저 소리 내면서 안아달라고 소리 지르곤 하는 원영이는 언제 저만큼 크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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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엘 공원에서의 행복했던 시간


원영이가 나오기 전에 첫째의 질투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지만 다행히도 수인이는 동생을 매우 예뻐하며 귀여워한다. 원영이도 누나만 보면 방긋방긋 웃고 누나가 돌아다니면 거기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어찌 보면 엄마보다도 누나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 아빠는 늘 꼴찌지.


중간에 꽃과 주변 기둥이 너무 예뻐서 사진 찍어줄 테니 동생과 함께 서보라고 했더니 이렇게나 예쁜 사진이 나왔다. 전에는 수인이 사진만 찍거나 우리 부부와 수인이 사진을 찍는 것이 주였다면 넷이 함께 오니 이렇게 아이들 둘만 찍어주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이런 사진을 보면 아이 둘과 함께 여행 다니는 것이 힘들지만 무척이나 흐뭇해진다. 이런 재미에 아이와 함께 여기저기 더 많이 다니게 된다.



여유롭게 구엘 공원의 여기저기를 다 보고 나왔는데도 이제 막 아침 10시. 중심가 쪽으로 가서 잠시 쉬면서 수인이가 좋아하는 바게트도 사주고, 역시나 구엘 공원에서 나오자마자 걷기 싫어하는 수인이를 달래서 까사 밀라(괴물집)와 까사 바트요(알록달록집)까지 봤는데 도무지 더 돌아다닐 상황이 되지 않아 그냥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낮잠이나 양껏 잤다. 그래 이렇게 여유롭게 다니는 거지. 그러라고 바르셀로나에서 여유롭게 일정을 잡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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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집과 알록달록집


약 2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서 오후 산책을 슬슬 나갔다. 숙소 앞에 가로수가 우거진 보행자용 거리가 있는데 분위기가 정말 좋다. 가끔 차나 오토바이가 지나가긴 하는데 오히려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걸 보면 보행자 우선 도로 같았다. 관광지가 아니다 보니 붐비지도 않고, 햇살이 아무리 뜨거워도 피할 수 있으니 금상첨화. 걷기 싫어하는 수인이도 여기서만큼은 잘 걸었다. 어쩌면 더워서 더 걷기 싫은 건가. 원영이는 밖에만 나오면 그저 신난다. 발을 동동, 가끔 소리도 "어, 어."


바르셀로나엔 걷기 좋은 길이 많다. 숙소 앞 길은 물론이고 바르셀로나에 오면 누구든 간다는 람블라 거리도 걷기에 정말 좋다. 그 외 시내 길들에도 가로수들이 다들 잘 되어 있어서 뜨거운 태양을 금방 피할 수 있다. 이런 길들 때문에 바르셀로나가 더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나 보다.


버스를 타고 카탈루냐 광장에 내린 후 람블라 거리를 지나 보케리아 시장과 레이알 광장을 구경하며 벨 항구까지 걸어갔다. 그 긴 거리를 수인이가 어쨌든 잘 걸었다. 중간에 스타벅스에 가서 주스 마시면서 쉬기도 하고. 기특한 것. 고맙다 이쁜아. (물론 그 뒤로도 걷기 싫다고 해서 아빠랑 참 많이 싸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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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이는 배가 고프면 굉장히 크게 소리를 지르며 걷잡을 수 없기 때문에 꼭 3시간에 한 번씩 분유를 빠뜨리지 않고 줘야 한다. 우리 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람블라 거리를 끝까지 걸으면 나오는 벨 항구에서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원영이 분유를 먹였다. 아내가 원영이를 먹이는 동안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깨끗한 날씨 아래 여기저기 사람들이 자유롭게 앉아서 쉬는 모습이 보기 좋더라. 덕분에 의외로 이곳 벤치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여유롭고, 시원하고, 이국적이기도 한 굉장했던 시간. 어느 특정 관광지보다도 더 좋았던 시간이 벨 항구에서의 약 1시간이었다.


이곳에서 찍은 가족사진도 굉장히 마음에 들게 잘 나왔다. 보기 드물게 활짝 웃으며 사랑해요 포즈를 하는 우리 딸. 저런 모습을 다른 사진들에서도 많이 보여주면 얼마나 좋을까. 내 딸이지만 참 예쁘다. 못 말리는 푼수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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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항구에서의 멋진 시간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한번 더 보고 아시안 요리로 저녁을 먹었다. 점원이 원영이 보고 예쁘다고 눈을 떼지를 못했다. 이것 참. 딸도 예쁘고 아들도 이렇게 예뻐서야. 역시 푼수 아빠.


9시가 조금 안 된 시각인데도 밖은 상당히 밝았다. 한국이라면 오후 5시나 6시 정도라고 해도 믿겠다. 해가 완전히 지고 깜깜해지려면 10시는 돼야 한다. 바르셀로나에 와서 가장 적응이 안 되는 부분이 바로 이 긴 해다. 그래도 다행히 애들은 집에 오자마자 씻고 바로 잤다. 부디 내일은 시차 적응 잘하기를 비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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